넷플릭스 오리지널. ‘기차의 꿈’. 미국작가 데니스 존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무엇보다 헤밍웨이가 쓴 세계적 걸작 ’노인과 바다‘의 현대판 버전. 데니스 존슨은 이 작품을 헤밍웨이 작품 ’노인과 바다‘와 비교하거나 연결하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았던 한 노인이 어느 날 혼자 배를 몰고 나가 드물게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 과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청새치를 다 뜯기고 잔해만 끌고 온 현실. 죽음이 찾아오기에 충분한 나이였음에도 그는 바다에서 파도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다. 자연에 맞서는 그 처연함. ’기차의 꿈‘에서도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
그는 19세기말, 20세기 초중반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하층민이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고, 양부모에게 자랐으며, 학교 교육도 온전히 받지 못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이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일했는데, 몸은 튼튼한 편이어서 노동으로 먹고 사는 일이 익숙하고 당연하다. 철도 공사장에서, 벌목꾼으로 주로 떠돌며 일하는 그레이니어는 평생 바다를 본 적 없는, 아메리카 대륙의 내륙에서만 살아간다.
데니스 존슨이 쓴 짧은 중편 소설 한 편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 왜 하고픈 말은 더 많아지고, 삶과 운명에 관한 생각은 더 복잡하게 얽히고, 깊게 파고 들어가게 되는지 놀랍고 신기한 경험을 한다.
그레이니어의 삶은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 영웅서사의 주인공, 예수, 석가모니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윌든‘의 진짜 주인공이 그레이니어라는 착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레이니어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을 완성했다.
그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다. 친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자랐으며, 가난과 노동이 곧 그의 삶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세상에 의문을 갖거나 질문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땀흘려 일하고, 적은 임금으로 살았으며, 무언가를 탐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은 아내와 딸이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두 사람을 잃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다.
그는 마을 외곽, 숲에 살았으며 마을이 큰 도시로 발전했어도 그는 여전히 문명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숲에 살았다. 은둔자의 삶, 누군가와 다른 삶, 도시와 사람과 문명에서 서너 발짝쯤 떨어져 느리게 살아가는 삶이 그레이니어의 삶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변하고, 발전하고, 달라지는데 그레이니어의 삶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바뀌고 변하는 세상을 따라 돌지만, 오히려 세상이 그레이니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레이니어는 세상을 관조한다. 벌목꾼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상대하지만 오히려 멀리서 숲을 바라봐야 꺾어야 할 나무가 보이는 이치처럼, 그는 세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세상을 바라본다.
고대 신화의 영웅이 고난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그레이니어의 삶은 신화가 될 수 없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세상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말하는 성스러운 존재였다면, 그레이니어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한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삶을 마감했으므로 그는 성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레이니어의 삶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다). 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레이니어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이해’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지금도 그때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지 못한다. 그들이 나와는 혈연도 가족도 아니었지만, 그들이나 나, 내 가족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에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견디기 힘들다) 나는 한동안 운전하면서 많이 울었다. 내가 슬퍼하며 울었던 건 참혹하게 스러진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대한 비극적 감정의 표현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학생들이 바로 내 아들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아들, 딸과 같은 나이였기에, 내가 마치 그들의 부모라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니어도 가족을 잃었다. 그가 벌목장에서 돌아왔을 때, 마을 외곽 숲이 불타고 있었고, 그는 불길을 뚫고 집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는 아내와 딸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아내와 딸의 시신이라도 발견했다면 그의 삶은 덜 고통스러웠을까. 사라진 아내와 딸을 오래 찾아다녔고, 시간이 흘러서 다시 아내와 딸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레이니어는 불탄 자리에 다시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오래 살다 죽음을 맞는다.
그레이니어의 비극을 보편화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을 잃는다. 다만 시간의 차이와 변화의 빠르고 느린 차이일 뿐.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우리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슬픔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레이니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공간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감정으로 묵묵하고 외로움을 견디며 살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내와 딸을 마음에 품었으며, 결코 떠나보내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삶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질문에 다가간다. 모든 개인은 개별적 존재로 의미 있지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레이니어의 삶이 좋다거나, 올바르다거나,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적어도 가장 단순한 삶을 통해 ‘개인의 삶’을 군더더기 없이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