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알베르 카뮈 출생. 부친 뤼시맹 카뮈는 1871년에 알제리로 이주한 알자스 지방 출신으로
포도농장의 저장창고 노동자였다.모친 카트린 생테스 (후에 카뮈의 딸 이름이 카트린으로 작명되고,<이방인>
에는 뫼르소의 친구로서 생테스가 등장)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 출신으로 9남내 중 둘째였다.
알베르 카뮈 위로 형 뤼시앵이 있다.
* 1914년 8월 2일
제 1차 세계대전.
"나는 내 또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1차 세계대전의 북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우리의 역사는 그때
이후 끊임없이 살인,부정, 혹은 폭력의 연속이었다" <여름>중 (수수께끼).
그의 부친은 보병연대에 징집되어, 마른 전투에서 부상, 생 브리외크 병원에서 사망, 생 브리워크에
매장되었다. 그의 모친은 알제로 돌아와 벨쿠르라는 서민 지역(리용 가 93번지)에 정착했다.
카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지내며, 처음에는 화약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가정부 일을
하게 되는 어머니 --- 거의 말을 안하고 지내 벙어리가 되다시피 한 `표리' 중 <긍정과 부정의 사이>
어머니나, 자못 권위적이고 희극적인 할머니 카트린 카르도나, 그리고 통 수리공인 불구의 삼촌
에티엔<적지와 왕국> 및 형 뤼시행과 함께 가난하게 자란다.
2
"나는 마르크스를 통해 자유를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사평론 제 1권)"
* 1918~1923년
국민학교 재학시, 교사 루이 제르맹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는
수업 종료 후에도 카뮈를 지도해주고 중고등학교장 선발시험에 추천, 응시하도록 한다. 후에
카뮈는 노벨상 수상 연설집 (스웨덴 연설)을 그에게 헌정하게 된다.
* 1923~1930년
카뮈, 알제의 뷔조 중고등학교(문리과반의 반 기숙학생)
* 1926년
지드의 <사기꾼들>, 말로의 <서양의 유혹>.
* 1928년: 말로의 <정복자> 정독!
* 1928~1930년: 알제 대학 축구팀의 골기퍼. " 내가 나의 축구팀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유는 결국,
열심히 뛰고 난후에 뒤따르는 나른한 피곤함과 더불어 느껴지는 저 기막힌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고, 또한 패배한 날 저녁이면 맛보게 되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그 어리
석은 충동 때문이었다(알제대학 주보)"
3
* 1929~1930년
"처음으로 지드를 읽게 된 것은 내가 16세 때였다. 나의 교육의 일부를 책임 맡았던 삼촌이 때때로
나에게 책들을 주곤 했다. 푸줏간 주인인 그는 장사가 아주 잘 되었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거리는
독서와 사상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는 아침 나절에만 장사에 몰두하고, 나머지 시간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동네 카페에 나가 이야기와 토론으로 소일하곤 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양피 커버로
된 조그만 책 한 권을 빌려주면서 `너의 관심을 끌 책'이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 나는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대던 중이라,<여인들의 편지>(마르셀 프레보의 작품)읽기를 끝낸 후에,
삼촌이 건네준 <지상의 양식>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의 기도하는 듯한 문장들은 나에게 모호하게
느껴졌다. 자연이 주는 재화들에 대한 찬송 앞에서 어리둥절했다. 나는 16세 때 알제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풍요함을 벌써 실컷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는 다른 종류의 풍요함을 희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나는 그 책을 삼촌에게 돌려주면서 아닌게 아니라 그 책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해변가를 거닐거나 느긋하게 공부하거나 또는 한가하게 독서하면서 그 고달프기만
한 내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이리하여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드에게 보내는 경의)"
4
* 1930년
말로의 <왕도>, 문과반에서 장 그르니에를 스승으로 갖게 된다. 폐결핵 첫 발병.
요양에 부적당한 집을 떠나, 우선 무정부주의자이며 볼테르 숭배자인 푸줏간주인 귀스타브 아
코 삼촌 집에 기거하고, 기흉으로 앓는 동안 입원했다가 후에는 독립생활을 하며, 혼자서, 혹
은 여럿이서 함께 알제의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생활하게 된다.
* 1932년
문과 학업 계속. 학창시절 친구로 클로드 드 프레맹빌과 앙드레 벨라미슈를 사귀며
후자에게 카뮈는 나중에 로르카(스페인 시인,극작가)번역을 맡기게 된다. 폴 마티외 교수와 장
그르니에 교수와도 친분을 나누는데, 특히 철학자이며 문필가인 후자와의 친분은 오래도록 변
함없이 계속된다. 카뮈는 후에 그르니에 교수에게 <표리>와 <반항인>을 헌정하고, 은사의 저
서 <섬>의 서문을 쓴다. "장 그르니에 교수를 만났다. 그 역시 나에게 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내밀었다. `고통La Douleur'이라는 제목의 앙드레 드 리쇼Andre de Rechaud의 소설이었
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훌륭한 책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책은 내
가 경험해서 아는 것들, 즉 어머니라든가 가난이라든가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라든가 하는 것
에 대해서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책이다. 습관대로 하룻밤새에 그 책을 다 읽어 치웠다.
다음 날 잠에서 깨었을 때, 낯설고 새로운 자유를 가슴에 안고 나는 머뭇거리며 미지의 영역으
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책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망각과 심심파적만이 아니라는 교훈을 터득
한 것이었다. 나의 집요한 침묵, 지독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기묘한 이 세상,
내 가족들의 그 고결성과 가난,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등, 이 모든 것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
이었다. <고통>이라는 책으로부터 나는, 지드가 장차 나를 유인하여 끝어들이게 될 창작의 세
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막연하게나마 우선 엿볼 수 있었다(지드에게 보내는 경의)"
5
* 1931~1932년
후일에 건축가가 될 미켈, 나중에 조각가가 될 베니스티, 작가요 비평가인 막스 폴 푸셰 등과 교우.
* 1932년
잡지<쉬드>에 4편의 글을 발표
*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권력 장악, 카뮈는 앙리 바르뷔스와 로맹 롤랑에 의해 주도된 암스테르담-플레이엘 반파쇼
운동에 가입, 투쟁한다. 말로의 <인간조건>, 프루스트 작품 탐독
<반항적 인간> 중 <소설과 반항>참조. 장 그르니에의 <섬>.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
은, 실존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아이러니하고 시적인 문체로 강한 회의주의를 표명함으로써, 카
뮈로 하여금 그르니에를 사상적 스승으로 여겨 언제나 그 영향 입은 바를 잊지 못하게 했을뿐
만 아니라, <표리>와 <결혼>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 1934년 6월
시몬 이에와 첫 결혼, 그러나 2년 후에 이혼. 발레아르로 여행.
* 1934년 말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 회교도 계층에서의 선전 임무가 부여된다
카뮈는 1935년 라발(프랑스의 정치가)의 모스크바 방문 때문에 공산당의 친회교도 운동이 부
진해지자마자 공산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면적인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
며 <작가수첩>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카뮈의 친구들은 그가 1937년까지 공산당
원증을 갖고 다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문화원 책임을 그가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달리 설명할 수는 없겠다. 그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카뮈와 공산당 간의 결별
-카뮈의 설명-은 공산당과 알제리 인민당 간의 불화 직후였다는 것이다. 인민당은 당시 메살
리 하지가 주도했고, 그는 공산당원들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탄압 선동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
었다. 또 다른 몇몇 글들은, 카뮈가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에 가담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들은 현재까지 아무런 입증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삼촌 아코가 프리메
이슨 단원이라는 소문에서 연유된 혼동으로 여겨진다.
6
* 1935년
말로의 <모멸의 시대>, <표리>집필시작. "나로서는, 나의 원천이 <표리>속에, 내
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계의 추억
이 지금도,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만족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인생 자체에 관하여서는 지금도 <표리>에서 서툴게 말한
것보다 더 많이 알지는 못한다." 이 시기에 카뮈는 그에게 지급된 대여 장학금으로 알제 대학
에서 철학공부를 계속한다. 그러나 또한 생계 수단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이 해에
그는 정기적으로 대학 관상대에 나가 일하면서 남부 지방의 기압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곤 했
다. 또 그는 자동차 부속품을 팔거나, 선박중개인에게 고용되기도 했고(뫼르소처럼), 시청직원
으로 일하기도 했다.(그랑은 시청 직원으로 <페스트>에 등장한다).
* 1936년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한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관계를 주제로 한 철학 졸업논문(D.E.S)제출.
제목은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 에틱테토스,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말로, 지드 등의 작품 탐독.
3월 7일: 독일군의 레난 지방 재점령.
5월: 프랑스에서 인문전선 득세. 6월~7월: 중앙 유럽 여행<작가수첩> 그곳에서 첫 결혼이 파경에 든다.
7월 17일: 스페인 내란. 1935년에서 1936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카뮈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문화원의 책임을 맡았고 `노동극장'을 창단하였다. 이 극단을 위하여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아스튀르의 반란>
을 집필했으나 상연 금지되었고, 이것은 후에 샤를로 출판사에서 출판된다. 가
브리엘 오디치와 샤를로를 중심으로, `참다운 풍요'라는 기치 아래 지중해 문학운동이 전개된다.
7
* 1936년~1937년
알제 라디오 방송극단의 배우로서 한 달에 15일씩 방방곡곡을 순회공연.
* 1937년 2월
문화원에서 새로운 지중해 문화에 관해 강연.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철학교수
자격시험 응시 거부당함. 5월 10일: <표리>출간. 8월~9월: 말로에 관한 평론 계획. 요양을 위
해 앙브룅에서 체류. 이어 마르세유, 제노바, 피사를 거쳐 피렌체 여행. 명증하고 고뇌에 찬 열
정의 시기로서 <결혼>이 그 결실. 미발표의 <행복한 죽음> 집필. 시디-벨-아벨스 중학교 교
사직을 타성과 침체를 우려하여 거절. 10월 ~12월: 소렐,니체,슈펭글러(서양의 몰락)등을 탐
독. `노동극장'이 해체되고, `협력극장'에 흡수.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갈 것을 계획.
* 1938년: 파스칼 피아(후에 `시지프의 신화'를 그에게 헌정)가 주도하는 <알제 레퓌블리캥>
신문의 기자로 취직, 잡보 기사로부터 사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의회 기사와 문학란에 이르
르까지 여러가지 일을 담당했으며, 특히 알제리의 정치적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치기도 했다.
말로의 <희망>, 사르트르의 <구토>. 이미 이때부터 사르트르의 이 책을 면밀히 읽은 카뮈는
사르트르의 미학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사르트르가 실존의 비극성을 창출해내기 위해 인간의
추한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난한다. " 사르트르의 주인공은, 위대함을 딛고 근원적인
절망에서 일어서려고는 하지 않고 인간의 그 혐오스러운 면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고뇌가 지
닌 참된 의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 같다."(알제 레퓌블리캥 1938년 10월 20일자). <칼리
큘라>집필. 부조리에 관한 시론을 구상하며 <이방인>집필에 도움이 될 자료 수집.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신들의 황혼>,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탐독. 9월 30일: 뮌헨 협정.
8
* 1939년 3월
나치 정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합병.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의
책들을 탐독. 오디지오, 로블레스 등과 함께 <리바주>라는 잡지 창간. 앙드레 말로와 상봉.
사르트르의 <벽>. "위대한 작가는 그의 세계와 그의 주장을 항상 느끼게 해준다. 사르트르의
주장은 무이며, 또한 명철성에 있다(알제 레퓌블리캥 1939년 3월 12일자). 5월: 샤를로 출판
사에서 <결혼>출간. 6월: 카빌리(알제리의 산악지방)취재 여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지방 경관 한복판의 그 비참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국제적 긴장 고조로
그리스 여행 계획을 포기. "전쟁이 나던 해, 나는 율리시스의 순항 길을 다시 한 번 더듬기 위
하여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한 젊은이도 빛을 찾아서 바다를 건너질러
가는 화려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여름) 9월 3일: 제 2차 세계대전. " 첫째 할 일은
절망하지 않는 일이다.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자"
<여름>중 `편도나무들' " 가장 보잘것없는 임무를 가장 고귀하게 여기며 수행해 나갈것을 결
심"(작가수첩). 연대의식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려 했으나 건강 때문에 소집 연기. " 자기 나라
가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나라에 대하
여 연대감을 가져야 한다." <작가수첩>
9
* 1940년
<알제 레뷔블리캥>은 판매 보급상의 애로 때문에 <수아르 레퓌블리캥>에 합병(전
자는 10월 28일에 폐간되고 후자는 9월 15일에 창간되었으니 몇 주일간은 두 신문이 공종하
고 있었던 셈이다)된다. 그후 당국의 검열 요구에 불복, 1월 10일 폐간된다. 카뮈는 안정된 직
장을 당국의 압력 때문에 박탈당할 것을 예측하고 알제리를 떠난다. 검열받는 신문에 더 이상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을 결심을 하고서 파스칼 피아의 추천을 받아 <파리 수아르Paris Soir>
에 순전히 사무적인 임무를 띤 편집 담당자로 입사한다. "<파리 수아르>에서 일하면서, 파리
의 약동과 파리의 핵심을, 여점원 같은 그 천한 정신으로 느낀다<작가수첩>". 5월 이방인 탈
고. 5월 10일: 독일군 침입. 카뮈는 <파리 수아르>편집진과 함께 클레르몽으로 피난하나 12
월에 신문을 떠난다. 9월: <시지프의 신화> 전반부 집필. 10월: 임시로 리용에 기거. 12월
3일: 오랑 출신이며 수학교사인 프랑신 포르와 리용에서 결혼.
* 1941년 1월
오랑으로 돌아와 얼마 동안, 유태인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강의
2월:<시지프의 신화>탈고. " 악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에 관해서, 그리고 정의로운 인간으로
하여금 우선은 창조와 창조자에 대항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동료와 자기자신에게까지 대항하게
만드는 저 거역할 길 없는 논리에 관해서,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신화들 중
의 하나인 "<모비 딕Moby Dick>의 영향을 받아 <페스트>를 준비. 톨스토이, 마르쿠스 아우
렐리우스, 사드의 작품 및 <군인의 위대성과 노예성(프랑스 작가 비니의 작품)>,그리고 그가
13년 후 앙제 페스티발 때 각색하게 될 피에르 드 라리베Pierre de Larivery(프랑스 고전
극작가)의 <정령>등을 탐독. 12월 19일: 가브리엘 페리 처형(프랑스 공산당 위원이었던 페리
는 독일군 점령 당시 공산당 지하 비밀잡지의 간행을 주도했기 때문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
했다) ".....여러분들은 내게 어떤 이유로 항독 지하운동에 참가했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다. 집단 수용소의 입장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폭력 자체보다는 오히려 폭력으로 구성된 제도를 내가 더 혐오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속에 늘 막연히 자리잡고 있던
반항심이 절정에 달하게 된 그날을 나는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리용에서 신문을 통해
가브리엘 페리의 처형을 읽던 그날 아침 말이다(시사평론)". 항독 지하운동 시절에 대해 카뮈
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향수와 수줍음 때문에 옛 전사라는 것을 별로 얘기
하기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민족해방운동, 즉 `전투'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은, 파스칼
피아와 레노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카뮈는 후자에게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를 헌정하게 되고, 1947년에 간행된 레노의 '사후시집'의 서문을 쓰게 된다). 이 조직에서 카
뮈의 임무는 정보 활동과 지하신문 발간에 관한 것이었다. 곧 이어 그는 클로드 부르데(전투조
직의 간부와 사귀게 된다.
10
* 1942년
1941~1942년 겨울에 재발한 폐결핵 각혈 때문에 샹봉 쉬르 리뇽에서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까지 요양. 11월 8일: 북아프리카 지역의 영미 함대 상륙(아이젠하워 장군 지휘
아래 오랑, 알제에 상륙)때문에 카뮈의 알제리행이 중단되고, 샹봉 부근 파늘리에의 오크틀리
부인 집에 돌아와 기거. 그의 아내와 독일점령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헤어져 있게 된다. 통신
연락이 어렵고, 기차 타기를 싫어해서, 양쪽 폐가 다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따금 생
테티엔 시와 파늘리에 사이의 60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을 자전거로 달리기도 햇다. 이 시기
에 그는 프랑시스 퐁주와 관계를 맺는다.
* 1942년
멜빌, 다니엘 디포, 세르반테스, 발자크, 마담 드 라파예트, 키에르키고르, 스피노
자 등의 작품탐독. 7월: 이방인 출간.
* 1943년
<시지프의 신화> 출간. 비평계 일각에서 카뮈를 절망의 철학자로 규정, 선전.
<오해>초고 탈고.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제 1신 발표. 몇 달 동안, 리용 지방과 생테
티엔 지역을 왕래하며 생활. "지옥이 존재한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지옥은,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지내는 이 침울하게 끝없이 펼쳐진 길거리 모습과 닮았을 것이다"
"프랑스인 노동자들 곁에 있으면 나는 아주 편안하다. 내가 사귀고 싶고 함께 `살고'싶은 유일
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나와 같다(작가수첩)" . `의용병', `전투', `해방' 등 항독
지하운동단체들이 통합될 당시 `전투'의 지도자들은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그 당시 카뮈는 바
노 가에 있는 아드레 지드의 아파트에서 기거하면서 갈리마르 출판사의 고문직을 맡게 된다.
이 무렵에 아라공과 두 번째 만나게 된다.
* 1944년
사르트르와 상봉. 그는 카뮈에게 <폐문Huis cols>의 연출을 부탁하나 계획은 성
사되지 못함. <오해>상연, 시덥지않은 반응. " 아니다.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사르트르와
나는 우리 둘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다니는 것을 보고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어느 날 그만 성명을 발표하여, 우리가 서로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어떠한 상호관계도 각기 부정하고 있다고 우리의 입장을 밝히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농담으로 그쳤다. 사르트르와 나는 우리가 서로 알기 전부터 제 나름대로
의 저서들을 모두 발표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며, 내가 발표한 유일한 사상적인 책 <시지프의 신화>는
소위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여졌다"(1945년 11월 15일자 인터뷰).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제 2신 발표. 8월 24일: " 파리의 모든 총알들이 8월 밤하늘을
수놓는다(공개적으로 배포된 `전투'창간호). 파스칼 피아와 함께 <전투>지 편집, 운영.
11
* 1945년 5월 8일
바노 가의 앙드레 지드에게서 휴전 소식을 전해들음. 세기에 가에 정착.
5월 16일: 세티프(알제리의 도시)에서의 학살과 탄압, 카뮈는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여행한다. " 가난해진 민족을 위한 위대한 정치란 모범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길밖에는 없다.이
점에 대해 꼭 한 마디 해두어야 할 것은 프랑스가 실제로 아랍 지역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
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아랍 지역에 있어서 새로운 사상이다. 백만의 군대 그리고 수많은 유
전 못지않게 민주주의는 값질 것이다(1945년 12월 20일자 인터뷰)". 8월 6일,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투하. "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
래에, 집단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
이 분명하다(`전투'8월 8일자)" 9월 5일: 쌍둥이 자녀 장과 카트린 출생. <칼리굴라>상연, 대
성공. <반항인>의 출발점이 되는 <반항론>발표.
* 1946년
연초에 미국 방문. 대학생들의 열렬한 환영. 하버드에서는 연극에 관해서, 뉴욕에
서는 문명의 위기에 관해서 강연. <페스트>를 어렵게 탈고. 시몬 베이유의 작품을 발굴, 갈리
마르 출판사에서 미발표된 그의 저작들의 발행을 주도. 몇 달 동안 `전투'지 편집. 운영 포기.
1944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모리악과의 논쟁 때문에 카뮈는 폭력 문제에 대하여 체계적으
로 사색, 정리. "우리는 지옥 속에서 지냈고 그 후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여름)". 르네 샤르와 깊
은 친교. 10월: 사르트르, 말로, 쾨스톨러, 스페르버 등과 정치문제 토론.
* 1947년
마다가스카르의 반란. 카뮈는 집단 탄압을 맹렬히 균탄한다. "....문제가 사실로 나
타났다. 사실은 명백하고 추하다. 우리가 독일 사람들이 저질렀다고 비난했던 짓을 이번에는
우리가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전투')". 공산당, 정부에서 이탈. `프랑스 국민연합' 출범
재정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전투'지 편집진 분열. 올리비에, 피아,레몽 아롱은 `프랑스 국민
연합'에 가담하고, 장 텍시에는 사회주의 신문사로 옮겨간다. 카뮈는 사직하고 편집 운영을 클
로드 부르데에게 넘겨준다. `민주 혁명 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카뮈는 거기에 참여한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 노선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6월: <페스트>출간. 즉각적인 대선풍. 수많은
비평가들이 카뮈를 덕망있는 `무신론적 성자'로 찬양. 선전.
12
* 1947~1948년
1947년 여름과 1948년 여름을, 1946년에 며칠 지낸적이 있었던 루르마랭
부근에서 보냄. 아마도 1947년에 벌어진 정치 논쟁 때문에 카뮈와 메를로 퐁티 간의 친분관계
가 단절된 것 같다.
* 1948년 2월
프라하의 군사 혁명. 알제리 여행. 6월 티토, 공산당 정보국에서 추방. 아그리
파 도비네의 작품 탐독. 후에 이 사람의 작품 권두에 일종의 서문을 쓴다. 10월 27일: 장 루이
바로와 함께 쓴 <계엄령>상연. 실패.
* 1949년 3월
사형선고받은 그리스 공산당원들을 위한 구명 호소. 1950년 12월에 또 다
른 사형수들을 위한 구명 호소. 6월~8월: 남미 여행.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이미 허약해진 카
뮈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앞으로 2년 동안 <반항인>집필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하는 수 없이 한가해진 이 기간을 이용, 자기의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해 반성한다
12월 15일: <정의의 사람들> 첫 상연을 관람하기 위해 기동, 성공.
* 1950년
<시사평론> 제 1권 간행. 그리스 근교의 카브리스에서 얼마간 휴양, 보주 산악지
방에서 여름을 보냄. 마담 가 29번지 아파트에 입주.
* 1951년 10월
<반항인>이 출간되자 곧 이어 벌어진 논쟁이 1년이상 계속됨.
* 1952년
알제리 여행. 8월 사르트르와 결별. 11월: 레카미에 극장 운영 신청. 프랑코 장군
영도 하의 스페인이 국가로 인정받자 유네스코에서 탈퇴. 소설 <최초의 인간>과 <적지와 왕
국>을 구성할 중편들, 그리고 희곡<동쥐앙> 및 <악령>각색 등을 구상.
* 1953년 6월 7일
동베를린 폭동.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
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무관심하다면 도대체 우리들은 무
엇이란 말입니까?(신용조합에서의 연설)"
* 1954년
(7명의 튀니지 사형수 구명운동을 제외하고는)모든 정치적, 문학적 활동을 중단하
고 일년 내내 아무 글도 쓰지 않는다. " 내가 각색하고 있는 <악령>이 지금 엉망으로 되어 있
습니다. 하기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다시 글을 쓰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질리베르에게 보낸 편지)". 1939년에서 1953년까지 쓴 글들을 모은 <여름>출간.
11월: 이탈리아 여행
13
* 1955년 3월
디노 부차티(20세기 이탈리아 소설가)의 `흥미있는 경우'각색. 5월: 그리스
여행을 하며, <계엄령>을 야외 극장에서 다시 상연할 것을 구상하고 연극에 관해 강연.
6월: 기자 활동을 재개하여 <엑스프레스>지에 기고하고, 특히 알제르 문제를 취급.
* 1956년
알제 여행. 1월 23일: 카뮈는 휴전을 호소하나, 그의 동향인들로부터 매우 모욕적
인 대접을 받는다. " 알제리로부터 아주 낙담하여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오히
려 그 신념을 굳게 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었겠지만 참을 도리밖에
는 없지요. 모든 것이 다 타협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질리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2월: <엑스프레스>에의 기고 중단. 드 메종쇨 맻 체포된 수많은 알제리 민족주의자들과 자유
주의자들을 위한 구명 운동에 참여. 9월 20일: 자신이 각색한 포크너의 <어떤 수녀를 위한 진
혼곡> 상연. 성공. 부다페스트 봉기. 탄압 반대 회합에 참여. 수에즈 운하에 불, 영 군사작전.
<전락 간행>. <여름>의 후속으로 <축제> 집필 구상.
* 1957년 3월
<적지와 왕국> 출간. 6월: 앙제 연극 출제, 로페 데 베가의 <올메도의 기사>
각색. <칼리귤라> 재상연. 쾨스틀러, 블로크 미셀과 공동으로 저술한 <사형에 관한 성찰>에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게재. 10월 17일: 노벨 문학상 수상. 프랑스인으로 아홉 번째이며
최연소.
* 1958년 2월
<스웨덴 연설>출간. 6월: 알제리 연대기 <시사평론> 제 3권 출간. 이 저서를
통하여 카뮈는, 알제리의 갈등 및 문제 해결책 강구를 위한 면밀한 분석의 필요성을 제창했으
나, 유명 신문들은 아무런 논평도 가하지 않고 무시한다. 이 해와 다음해에도 카뮈의 건강은
쇠약. 6월 9일: 그리스 여행. 11월: 루스마랭에 주택 구입.
* 1959년 1월 30일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각색하고, 자신이 연출 상연. 문화부장관
말로가 카뮈에게 테아트르 프랑세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제의. 그러나 카뮈는 `완전히 새로 시
작'하고자 함. 거의 1년 내내, 카뮈는 많은 일을 아주 고통스럽게 해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루르마랭 집에서, 그는 자기의 집필 원동력을 다시 되찾기라도 한듯이 힘들이지 않고 <최초의
인간>의 일부를 써내려갔다.
* 1960년 1년 4일
미셀 갈리마르(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의 승용차에 동승한 카뮈,
몽몽트로 근교 빌블르뱅에서 교통 사로로 사망.
* 이 연보는 플레야드판 카뮈 전집 제 1 권 권두에 로제 키요Roger Quilliot가 작성, 수록했음.
* <번역>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김화영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