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9년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玄東轍)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남. 본명은 현경윤(玄敬允).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 가까운 대부도(大阜島)의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 1923년 인천의 대부 공립 보통학교(현재 대부 국민학교)에 들어감.
  • 1924년 보통 학교를 중퇴하고 중동 학교 속성과 1년을 다님.
  • 1925년 제일 고보(현 경기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중퇴함.
  • 1932년 동화 '고무신'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가작으로 뽑힘.
  • 1936년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문학에 뜻을 둔 이후 작가 김유정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됨.
  •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됨. 이후 1940년까지 조선일보 부록 "소년조선일보"와 "소년"지에 많은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임.
  •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출판부장을 맡음. 소년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아문각)과 동화집 "포도와 구슬"(정음사)이 간행됨.
  • 1947년 동화집 "토끼 삼형제"(을유문화사)와 소설집 "남생이"(아문각)가 간행됨.
  •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함.
 
현덕에 관한 소개는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뒤 직접 적은 《자서소전》(1938)뿐이었으나, 최근 원종찬(1994, 1995)에 의해서 현덕 생애에 대한 자료가 수집되었고, 이선영 등(1993)을 통해 제시된 현덕의 '월북 이후의 작품'(〈부록 7〉참조)목록과 1930년대 간행물을 통한 현덕 작품 연보가 완성되어가고 있다(〈부록1-7〉참조).
현덕은 우리 문학사에서 드물게도 성인문학과 아동문학 양쪽에서 관심의 비중이 높은 인물로서, 작가의 '카프적'인 성향이 작품을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놓으면서도 작품의 주제가 계급지향성으로 흘러가지 않은 작가나름의탈이데올로기적 창작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가적 성향에 근거한 현덕의 작품세계 분석을 위하여 그의 생애와 연결된 문학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덕은 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의 어느 별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현동철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의 직업은 상업(제일고보 학적부에 의하면)이라고 되어 있으나, 《자서소전》에 나타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분의 성격이란 패가한 호화자제의 전형이어서, 사대주의요, 투기적이고, 또 극히 호인이며, 낙천가이어서 자기는 매사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 사업하고 사업을 꿈꾸며 경향으로 돌고, 가사엔 불고하였다.
현덕의 집안 살림은 매우 비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잦은 이사는 어머니의 경제적인 자구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덕에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작품의 인물설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노마가 멀리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귀뚜라미'에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나, 어머니의 고생스러운 생활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위대함을 존경스러워 하는 모습 등은 그의 가정환경에서 받은 영향이라 하겠다.
그 사이(생략) 이리저리 집을 옮긴 수가 이십여 회, 살림을 고만두고 식구가 각자 헤어지길 수삼, 그럴 때마다 나는 조부의 집으로, 당숙의 집으로 돌며 몸을 붙였다. 당숙의 집인 인천 근해의섬 대부도에서 보내던 삼사년 간의 소년 시절이 가장 꽃다운 때(생략) 중산계급의 의식주에 근심이 없는 생활도 맛볼 수 있었고(생략), 학교 교육도 여기서 받은 2년간이 제대로 받은 교육이었다.
현덕의 이러한 어린 시절의 불우한 생활환경은 작품 속에서는 '현실에 대한 도피 심리를 유발'이라는 형식으로 노마라는 어린이를 등장시켜, 낭만적 요소가 가미된 순수성과 천진한 분위기로 어려운 현실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덕의 현실도피적 낭만성은 아동 문학에 있어서도 아동을 천진하고 밝은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30년대의 카프 작가들의 일반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현덕의 작품경향은 당시의 평론가들에게는 생소할 뿐 더러, 주류에서 벗어난 창작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동안 현덕 연구의 부진을 초래했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후,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허약한 그의 몸이 도저히 노동을 견뎌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독학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작가 김유정을 만나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1932년 타계한 김유정과의 친분은 현덕 문학의 문체에 많은 영향을 주어 '해학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현덕은 1932년 동화가작으로 《동아일보》에 입선 한 후, 주요 작품활동기인 1938-9년에는 《조선일보》부록으로 일주일마다 발행되었던 《소년조선일보》에 가장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 1938년 1월 8일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남생이〉가 당선되어, 당시 평론가들(안회남, 백철)의 극찬을 받으며, 주목받는 신진작가가 된다. 이를 계기로 〈경칩〉〈층〉〈두꺼비가 먹은 돈〉〈골목〉〈군맹〉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8-89년에는 《조선일보》에 주인공 '노마'의 눈을 통해서 아동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린 '리얼리즘 유년동화'를 40여 편 발표하였다. 현덕의 작품집으로는 동화집 〈포도와 구슬〉(1946년, 정음사), 〈토끼 삼 형제〉(1947년, 아동문학협회)가 있으며, 소년소설집에 〈집을 나간 소년〉(1946, 아문각, 1993, 도서출판 산하), 〈광명을 찾아서〉(1947?)등과 단편소설집 《남생이》가 있다.
당시 산문문학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문단에서 순수파 또는 기교파로 분류된 현덕(권영민, 1988)은 창작동화와 소년소설 등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아동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 카프문학을 극복하고 생활 속에서 아이들의 삶을 아이들의 말로 그리고자 한 현덕은 뚜렷한 장르의식을 가지고 소설, 소년소설, 동화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현덕은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면서 '문맹'의 출판부장을 맡는 등 문화운동에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정작 민족의 해방이 찾아온 1945년 이후에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못 써내게 되며(윤석중, 1963), 월북한 작가이기에 그 동안 연구가 소홀하였다.
김영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