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에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날 대형 여객선에서는 출항을 앞두고 늘 하는 일들을 하느라 모두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육지의 전송객들은 친구들을 전송하느라 한데 뒤섞여 붐볐고,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 쓴 전보 배달 소년들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객실을 훑고 다녔다. 커다란 여행가방과 꽃들이 어렵사리 운반되고, 아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층계를 오르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케스트라는 선상 쇼를 준비하느라 계속해서 연주를 해댔다. 나는 그렇게 법석대는 소동에서 약간 벗어난 갑판 위에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우리 옆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두세 번 섬광을 내며 터졌다. 아마도 어떤 저명 인사가 출항 직전에 서둘러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친구는 그쪽을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센토비치라는 저 희한한 인물도 우리와 같은 배를 탔군."
내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설명조로 덧붙였다.
"세계 체스 챔피언인 미르코 센토비치 말일세. 저 사람은 미국 전역을 동분서주하며 체스 대회를 싹쓸이 하고서 이제 새로운 승전고를 올리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원정 가는 길이라네."
사실 나는 그때서야 그 젊은 세계 챔피언을 기억해냈다. 그의 눈부신 출세 가도와 관련된 몇 가지 세세한 내용까지 떠올렸다. 하지만 신문을 나보다 더 꼼꼼히 읽는 내 친구는 여러 가지 일화를 들어가며 센토비치의 경력에 대해 보완 설명해주었다.
약 일년 전에 센토비치는 알예친, 카파블랑카, 타르타고버, 라스커, 보골류보프 등과 같이 내노라 하는 쟁쟁한 체스 대가들과 단번에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1922년 뉴욕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서 일곱 살 난 신동 레체프스키가 등장한 이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영예로운 체스인 조합에 그처럼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출현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센토비치의 지적 수준으로 미루어 보아 그처럼 눈부신 출세를 할 징조는 처음부터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체스 챔피언이 일상 생활에서는 맞춤법에 맞는 말을 전혀 구사할 줄 모른다는 비밀은 곧 밝혀졌다. 화가 난 동료 체스 선수 가운데 한 명이 통분해서 비꼰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든 센토비치의 무식함은 정말 세계 챔피언감'이었다.
센토비치는 남부 슬라브 지방 도나우 강변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느 날 밤 센토비치의 아버지가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가다 곡물을 운반하는 기선과 충돌하여 죽자 센토비치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외딴 곳에 살던 한 신부가 그 당시 열두 살밖에 안 된 센토비치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다. 마음시 좋은 신부는 무뚝뚝하고 둔감하며 넓적한 이마를 가진 이 아이가 읍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집에서 별도로 보충해주려고 몹시 애를 썼다.
하지만 신부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센토비치는 백번씩이나 설명해준 글자도 항상 낯설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느릿느릿 작동하는 그의 두뇌는 아무리 쉬운 과목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자랄 만큼 자라 열네 살이나 되었는데도 셈을 할 때 손가락을 꼽아서 했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것은 특히 더 힘들었다. 그런데도 센토비치는 결코 짜증을 내거나 반항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라 했다. 물을 길어오고 장작을 패고 밭일을 거들고 부엌을 청소했다. 짜증이 날 정도로 느리긴 했지만, 시키는 일마다 모두 믿을 만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선량한 신부가 이 별난 아이에 대해 가장 언짢게 생각한 것은 철저히 무관심한 그의 태도였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도 않았고 질문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특별히 시키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 하는 법이 없었다. 집 안 일을 마치고 나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방안에 죽치고 앉아 마치 목장의 양들처럼 멍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신부는 길다란 시골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그 지방 파출소장과 체스 세 판을 두곤 했다. 그러는 동안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한 센토비치는 말없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졸려서 내리덮이는 묵직한 눈꺼풀 아래 무심한 눈길로 줄무늬 체스판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겨울날 밤, 신부와 파출소장이 평소처럼 체스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급하게 달려오는 썰매 종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모자 위까지 눈을 잔뜩 뒤집어쓴 농부 한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늙으신 어머님이 임종 직전이니 신부님이 얼른 가서 종부성사를 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신부는 지체하지 않고 농부를 따라 나섰다.
따라놓은 맥주 잔을 비우지 못한 파출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여 문 뒤 묵직한 경찰용 장화를 막 신으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방금 전에 신부와 두던 체스판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센토비치의 모습이 파출소장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네가 한 번 둬볼래?"
파출소장은 농담삼아 물어보았지만, 졸음이 가득 찬 그 소년이 체스판 위의 말 하나도 제대로 옮겨놓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센토비치는 수줍게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신부가 있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데 그 판은 14번째 말을 두고 나서 파출소장의 패배로 끝이 났다. 파출소장은 자신이 결코 실수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번째 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온 신부는 체스판을 보고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발람의 나귀로군."
신부는 성경에 밝지 못한 파출소장에게, 2천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적이 일어났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말못하던 벙어리가 갑자기 지혜로운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꽤나 깊은 밤이었는데도 신부는 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자신의 제자에게 한판 대결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센토비치는 신부 역시 가볍게 물리쳤다. 센토비치는 끈기 있게, 아래로 떨군 그 넓은 이마를 체스판에서 단 한 번도 떼지 않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천천히 체스를 두었다. 아무도 반격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했다. 파출소장도 신부도 그 다음 며칠 동안 센토비치를 상대했지만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평소에는 덜 떨어진 자기 제자의 숨겨진 재능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 신부는 이제 강렬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렇게 한쪽으로만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좀더 엄격한 시험을 과연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신부는 연한 금발의 더벅머리 센토비치를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마을 이발사에게 데려가 이발을 시킨 뒤, 썰매에 태워 이웃의 작은 도시로 데려갔다. 신부는 그 도시 중심가에 있는 한 카페에 열렬한 체스꾼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대적 상대가 되지 못한 다는 것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외투 안쪽으로 양가죽을 걸치고 묵직해 보이는 긴 장화를 신은 연한 금발의 앳된 열다섯 살 짜리 소년이 신부와 함께 까페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년은 낯선 분위기에 수줍게 눈을 내리깐 채 사람들이 체스 탁자로 부를 때까지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첫 판에서는 센토비치가 졌다. 사람 좋은 신부하고 체스를 둘 때는 이른바 시실리아식 배치를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판에서 벌써 그 중에 가장 잘 둔다는 사람과 비겼고, 세 번째, 네 번째 판을 거듭하면서 한 사람씩 상대를 격파해 나갔다.
이 일은 남부 슬라브 지역의 작은 지방 도시에서는 결코 흔치 않은 떠들썩한 사건이 되었다. 농부 출신 체스 챔피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 그곳에 모인 지방 유지들에게 즉시 대단한 화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이 신동을 다음날까지 하루 더 그 도시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체스 클럽의 다른 회원들도 불러오고, 특히 체스를 광적으로 즐기는 심치치 노백작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부는 새삼스럽게 자부심을 느끼며 자신의 양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발굴해냈다는 기쁨에 겨워 자신의 의무인 일요일 미사까지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센토비치를 한 번 더 시험해보도록 혼자 남겨두고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린 센토비치는 체스꾼이 비용을 대서 호텔에 묶게 되었고 그날 밤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실도 써보았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 체스 시합장은 사람들로 넘쳤다. 센토비치는 네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체스판 앞에 앉아서 말 한 마디 없이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상대를 차례차례 물리쳐나갔다. 마침내는 시뮬탄 게임을 두자는 제안이 나왔다. 시뮬탄 게임은 혼자서 여러 명의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이 무지한 소년에게 이해시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그 같은 체스 관례를 파악하자마자 센토비치는 재빨리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찌걱거리는 무거운 신발을 질질 끌며 이 탁자 저 탁자를 오가며 체스를 두어 결국에는 여덟 판에서 일곱 번을 이겼다. 그러나 이제 떠들썩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새로운 챔피언이 그 도시 주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지방 출신이라는 지역적 자부심을 환하게 지펴주었다. 지도에 나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존재를 거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은 도시가 마침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유명 인사를 배출했다는 영예를 안을지도 몰랐다. 보통 때는 주둔군의 카바레에 샹송 가수와 여가수 나부랭이를 대주던 콜러라는 뚜쟁이는, 누군가가 어린 소년에게 일년간 후원금을 대주면, 자기가 잘 아는 비엔나의 유능한 선생에게 소개해서 전문적인 체스 기술을 사사받게 해주겠다고 소개해서 전문적인 체스 기술을 사사받게 해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육십 평생 매일같이 두어온 체스 게임에서 그처럼 특출한 적수와 한 번도 맞서본 적이 없었던 심치치 백작이 즉시 그 돈을 대겠다고 서명했다. 이날부터 뱃사공의 아들 센토비치의 눈부신 출세가도 열리기 시작했다.
반 년 뒤에 센토비치는 체스 기술의 모든 비법에 통달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한계를 드러났는데, 체스를 단 한 판도 외워서, 또는 전문가들이 말하듯이 눈을 감고 두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점이 나중에 체스 전문가들 사이에서 면밀한 관찰 대상이 되고 조소거리가 되었다. 센토비치에게는 체스판을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는 64칸으로 이루어진 흑백의 사각형과 32개의 말을 항상 구체적으로 눈앞에 두고 있어야만 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도 접을 수 있는 포켓용 체스판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대가들의 판을 복기해 보거나 어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보려 할 경우, 말의 배치 상황을 시각적으로 직접 눈앞에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그 자체로는 하찮아 보이는 이런 약점이 센토비치의 빈약한 상상력을 드러내주었고,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음악의 대가들 가운데서도 악보를 펼쳐놓지 않고서는 연주나 지휘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연주자나 지휘자가 있는 경우와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두드러진 특성도 그의 놀라운 출세가도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열일곱 살의 나이로 이미 여러 개의 체스 대회를 휩쓸었고, 열여덟 살 때에 헝가리 선수권을 획득했으며, 스무 살 때에는 마침내 세계 체스 챔피언에 등극했다. 지적인 능력이나 상상력과 담력에서 센토비치를 훨씬 능가하는 대담무쌍한 챔피언들도 그의 끈질기고 냉철한 논리에는 견뎌 내지 못했다. 이러한 점은 마치 나폴레옹이 답답한 쿠투소프에게 패한 사건이나. 또한 리비우스가 전하는 바와 같이, 센토비치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눈에 띄게 둔중하고 우둔한 모습을 보였던 파비우스 쿤크타토르에게 한니발이 패한 경우와 흡사했다. 철학자나 수학자처럼 치밀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흔히 창조적인 인물, 즉 여러 유형의 뛰어난 지성인들이나 오를 수 있는 체스 대가들의 고상한 반열에, 이와 같이 지적 세계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자 둔감하며 말수가 적은 농가의 젊은이가 최초로 끼게 된 셈이었다. 제아무리 노련한 신문기자들조차도 이런 인물에게서는 기사로 쓸 만한 단 한 마디 말도 끌어내지 못했다.
물론 센토비치는 신문에 세련된 수식어로 실릴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에, 곧 그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로 지면이 대신 채워져 갔다. 대적 상대가 없는 챔피언으로 체스판을 털고 일어서는 순간의 센토비치는 달리 어쩔 수 없이 기묘하기 짝이 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인물이 되었다. 격식을 차린 검정 양복에도 어딘가 거부감을 들여 손톱을 다듬었는데도, 그의 부자연스러운 태도나 거동에는 시골의 사제관 방구석을 청소하던 때와 같은 둔한 촌놈 티가 그대로 묻어났다.
센토비치는, 어설프고 아주 파렴치할 정도로 졸렬하게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이용해 좀스럽고 천박스럽기까지 한 탐욕을 보이며 돈벌이에 급급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체스 전문가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고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도시 저 도시 옮겨 다니며 여행할 때마다 가장 값싼 호텔에 묵었고 사례금을 주겠다는 보장만 있으면 아무리 하찮은 클럽에서도 체스를 두었으며, 비누 광고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심지어 문장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경쟁자들의 조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체스의 철학》이라는 책에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었다. 사실 이 책은 갈리시아의 어느 가난한 대학생이 수완 좋은 출판업자를 위해 쓴 책이었다.
매사에 무딘 천성대로 센토비치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무감각하였다. 그러나 세계 체스 대회에서도 우승한 뒤로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양 굴었다. 영특하고 지적이며 탁월한 그 모든 자들, 말이나 글로 떠들어대는 그 모든 자들을 그들의 홈그라운드에서 격파했다는 의식과, 무엇보다도 그들보다 수입이 더 많다는 명백한 사실로 말미암아, 원래는 모호함 성품이 냉담하고 아주 졸렬한 정도로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러니 저런 골통이 어찌 갑작스런 명성에 도취되지 않았겠나?"
친구는 내게 센토비치의 유치한 우월감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바나트(루마니아의 지방 도시 : 옮긴이) 출신의 스물한 살 짜리 촌놈이 어느 날 갑자기 나무판 위에서 일주일 동안 말을 잠깐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고향 사람 모두가 일년 내내 나뭇짐을 해대며 뼈빠지게 일해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셈인데, 저렇게 방자한 자만심이 어찌 안 생기겠나? 언젠가 렘브란트나 베토벤, 단테나 나폴레옹 같은 위인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면 자신이 위대한 사람인 양 구는 것도 그야말로 아주 쉬운 일이 아닐까? 저런 녀석의 꽉 막힌 머릿속에는, 지난 몇 달 동안 한 판도 체스에 진 일이 없다는 단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다네. 이 세상에 체스와 돈 말고 더욱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니, 자신에게 도취될 만하지."
친구가 들려준 이런 이야기는 내 특별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단 한 가지 일에만 생각을 집중하는 편집광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 평생 매력을 느껴왔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역을 제한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으론 무한성에 그만큼 더 가까이 근접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런 사람들은 그들 특유의 분야에서는 흰개미처럼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축소판 세계를 구축해 놓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지적인 면에서 외골수형의 이 특이한 전형을 리오까지 가는 12일 동안 좀더 자세히 관찰해봐야겠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는 내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자네 뜻대로는 안 될 걸. 내가 아는 한, 센토비치에게서 심리학적 소재를 조금이라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네. 저 약삭빠른 촌뜨기는 우매하기 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아주 영악한 면도 갖추고 있거든. 그래서 자신의 영역이랄 수 있는 작은 술집에서 고향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대화를 아예 기피하는 단순한 기교를 쓴다네. 상대방이 배운 자라는 낌새가 보이면 달팽이집 같은 자기만의 세계로 기어들어가버리는 걸세. 그래서 센토비치의 멍청한 말 한 마디가 한 없이 무식해 보이는 모습을 포착했다고 당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네."
친구의 말은 사실 어디까지나 옳았다. 뻔뻔스러운 정도로 넉살이 좋지 않으면 센토비치를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여행 초반의 며칠 동안에 드러났는데, 어쨋든 나한테는 그런 넉살이 없었다. 센토비치는 이따금 갑판위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뒷짐을 진 채 마치 유명한 그림 속의 나폴레옹처럼 오만하게 혼자서만 골몰하는 자세로 지나갔다. 더군다나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총총걸음으로 뒤쫓아가야 할 정도로 항상 황급한 걸음으로 소요학파식의 갑판 산책을 하곤 했다. 사교실이나 바, 흡연실에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승무원이 은밀히 알아보고 나서 내게 알려준 준 바에 따르면, 센토비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객실에서 커다란 체스판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판을 다시 연습해보거나 복기하며 지낸다는 것이었다.
사흘이 지난 뒤 그에게 접근하려는 나의 의지보다 센토비치의 능숙한 자기 방어술이 더욱 능란하다는 점에 은근히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는 체스 챔피언과 개인적으로 사귈 기회를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유형의 인간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평생 동안 오로지 흑과 백의 64개 칸으로 구성된 공간을 맴돌고 한 인간의 활동이 내게는 더욱 불가사의해 보였다. 인간이 고안해 낸 온갖 놀이 가운데 이 출중한 '왕가 게임'의 신비스러운 매력을 나는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체스 게임에서는 우연히 형성된 어떠한 압박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빠져 나올 수 있다. 승리의 영광은 오로지 정신력이나 특정한 형태의 정신적 재능을 갖춘 자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체스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부르면서 미리 그 의미를 축소시켜버리는 모욕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체스는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모하메트의 관처럼 학문과 예술 사이를 오가면서 모든 대립적인 쌍들을 비길 데 없이 멋지게 결합해주는 일종의 학문이자 예술이 아닐까?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으면서도 항상 새롭고, 구성면에선 기계적이면서도 상상력을 통해서만 효력을 발휘하고, 기하학적인 면에선 부동의 공간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결합 방식에서는 무제한적이고, 끝없이 전개되는 것 같으면서도 더 이상 풀리지 않는다. 체스는 어떤 결과도 보지 못하는 사고이자 아무것도 계산해내지 못하는 수학이고, 작품 없는 예술이자 실체 없는 건축이다. 그런데도 이미 입증된 바와 같이 그것은 존재와 현존 방식에서 어떤 책이나 작품보다 더 영속적이며, 어느 민족이나 어느 시대에도 있어온 유일한 게임이다.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고 감각을 연마하고 정신을 긴장시켜주기 위해 과연 어떤 신이 이 세상에 체스를 가져왔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체스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어떤 아이라도 체스의 기본 규칙쯤은 깨칠 수 있고, 아무리 서툰 사람이라도 체스를 두어볼 수야 있겠지만, 변할 수 없는 이 좁은 정방형의 체스판 안에서 독특한 방식의 대가들이 탄생할 수도 있는 법이다. 다른 분야의 어떤 대가들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오로지 체스에만 국한하여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 즉 수학자나 시인이나 음악가들처럼 상상력과 인내력과 기교가 일정하게 배분되어 효과를 내면서도 또 다른 층위와 결합 형태를 보이는 특출한 천재들이 말이다.
옛날에 골상학이 판을 치던 시대에는, 체스 천재에게는 두뇌의 회색 물질 속에 특별한 굴곡이 있거나 일종의 체스 근육이나 체스 돌기가 보통 사람의 두개골보다도 더 집약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해보기 위해 체스 대가들의 뇌를 해부해봤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골상학자가 보기에 센토비치의 경우는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는가. 지적인 면에서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머릿속에서 그렇게 특별한 천재성을 분출해 보이는 것이 마치 1백 킬로그램의 폐석 속에 단 한 가닥의 금줄이 나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원래 나는 체스와 같이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게임에서는 특출한 걸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오로지 흑백의 좁은 외길에만 국한시키기고 32개의 말을 그저 이리저리, 앞뒤로 움직이는 가운데서 삶의 승리를 찾는 인간의 삶을 상상해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새판을 두기 시작할 때 폰(장기로 치면 졸에 해당하는 말로서 오직 앞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 옮긴이) 대신 나이트(중간에 상대편이나 자기편의 말이 있어도 가고자 하는 칸이 비어 있으면 넘어갈 수 있다. : 옮긴이)를 택하는 것부터가 이미 대단한 일이며, 체스 교본 한 구석의 하찮은 작은 모서리에서 영원한 의미를 찾는 인간 - 10년, 20년, 30년, 40년 동안을 나무로 된 체스판 위에서 나무로 만든 킹을 구석으로 몰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일에 자신의 모든 지력을 쏟아부으면서도 결코 미치지 않는 정신적인 인간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특별난 천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바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러한 비범한 인물이 지금 공간적으로는 나와 같은 배 위에 처음으로 아주 가까이 여섯 방밖에 안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런데도 정신적인 문제에는 항상 광적일 만큼 호기심을 보이며 빠져드는 나 같은 사람이 불행하게도 그에게 접근할 방도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테면 유명한 신문에 낼 인터뷰라고 그럴듯하게 꾸며대면서 그의 우쭐한 허영심을 부추겨볼까, 아니면 벌이가 짭짤한 스코틀랜드의 체스 시합을 제의함으로써 그의 물욕을 자극해볼까 하면서 허무맹랑한 술책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뇌조를 유혹하려는 사냥꾼의 가장 확실한 기술은 뇌조가 교미 때 내는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라는 얘기를 기억해냈다. 체스 대가의 관심을 끄는 데 스스로 체스를 두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진정한 체스 고수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체스를 늘 경박한 놀이 정도로 생각하며 오직 심심풀이로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시간 정도 체스판 앞에 앉아 있는 경우, 그것은 긴장하며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정신적 긴장감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대담한 새 단어를 독일어에 도입하자면, 진정한 체스 선수들이 체스를 '진지화'하는 반면에 나는 엄밀한 의미의 말 그대로 체스 '놀이'를 한다.
사랑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체스에서도 상대방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여객선에 우리말고 또 다른 체스 애호가가 있을지 당장에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유인해내기 위해 휴게실에다 유치한 덫을 놓기로 했다. 그것은 새를 잡는 사람의 수법처럼, 나보다도 체스를 더 못 두는 내 아내를 체스판 앞에다 앉혀놓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채 여섯 수도 두기 전에 벌써 누군가가 지나가다 멈춰 서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구경해도 좋겠느냐고 정중히 물어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바란던 대로 한 판 두자고 도전하는 상대가 나타났다.
맥코너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지하공사 기술자로서, 내가 들은 바로는 캘리포니아에서 석유시추 사업을 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로 보면, 거의 정방형의 강한 턱뼈와 단단한 치아, 그리고 위스키를 너무 마셔서 그런지 눈에 띄게 검붉은 얼굴색을 가진 땅딸막한 사람이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듯한 떨 벌어진 어깨는 유감스럽게도 체스를 두는 동안에도 특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성공에 스스로 도취되는 유형의 인물로서 사소한 놀이에서 지는 것조차 곧 자존심이 깎이는 일로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방약무인하게 세상을 헤쳐나가는데 익숙해 있고 실제로 성공만을 추구하는 이 같은 자수성가형은 못 말릴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에 대한 어떠한 방어도 무례한 반항이자 거의 모독에 가까운 일이라고 분개할 정도였다.
첫 번째 판에서 지자 맥코너는 투덜거리면서, 단 한번의 순간적인 부주의로 그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며 독단적으로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세 번째 판에서는 옆방에서 시끄럽게 굴어서 진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한 번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복수전을 하자고 나서곤 했다. 처음에 나는 그처럼 끈덕진 공명심을 보고 즐겼지만, 결국에는 세계 챔피언을 우리 탁자로 끌어들이려는 내 본래의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복수 현상쯤으로 받아들였다.
세 번째 날, 내 의도가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절반쯤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센토비치가 갑판 위를 거닐다가 체스판 앞의 선실 창문을 통해 우리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쨓든 그는 우리 같은 풋내기들이 자신의 예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탐색하는 눈빛으로 우리의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마침 맥코너가 둘 차례였다. 그런데 맥코너가 둔 한 수만으로도 센토비치 같은 대가의 관심을 계속 붙들어둘 만한 판이 못된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책방에서 권하는 조잡한 탐정소설을 한 장도 들춰보지 않고 그냥 던져놓고 나올 때와 같은 몸짓으로 그는 우리가 둘러앉은 탁자를 벗어나 휴게실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냉담하고 비웃는 듯한 센토비치의 그런 눈빛에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호의를 보이면서도 너무 쉽게 판단해버리는 군'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쾌한 기분을 어느 정도 풀어볼 양으로 맥코너에게 이렇게 말을 던졌다.
"당신의 수가 저 챔피언에게 별 흥미를 못 준 것 같군요."
"어떤 챔피언 말이오?"
나는 맥코너에게 방금 우리 옆을 지나가면서 가소롭다는 눈길로 우리 시합을 쳐다본 사람이 바로 체스 챔피언인 센토비치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다가 우리 둘이서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한다. 자기는 고상한 척하며 우리를 무시하는 그런 태도에 마음 상해할 필요 없이 감수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별 볼일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이 말에 맥코너는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곧바로 흥분해서 우리들이 두다 만 판도 잊은 채 공명심에 들떠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센토비치가 같은 배에 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센토비치와 반드시 한 판 둬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다른 40명과 함께 한 편이 되어 시물탄 게임을 딱 한 판 둔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세계 챔피언과 체스를 둬본 적이 없다는 말도 늘어놓았다. 그 시물탄 게임은 정말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는데 그 판에서 자기편이 거의 이길 뻔했다는 것이었다.
맥코너는 나에게 센토비치를 개인적으로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그럼 센토비치에게 말을 걸어서 우리와 한 판 두자고 부탁해볼 수 없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센토비치는 새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며 맥코너의 청을 거절했다. 더군다나 무슨 수로 세계 챔피언을 꼬드겨. 우리 같은 삼류 선수들과 대적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맥코너같이 그렇게 야심만만해 하는 사람에게 삼류 선수라는 표현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화가 나서 몸을 뒤로 젖히며, 자기 생각으로는 센토비치가 신사의 정중한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 자신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는 말을 불쑥 던졌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나는 세계 챔피언에 대한 인물평을 짤막하게 해주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우리가 두다만 체스판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급한 성미를 참지 못하고 갑판 위로 센토비치를 뒤쫓아갔다. 저렇게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은 일단 어떤 일에 뜻을 두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는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상당히 긴장된 상태로 기다렸다. 10분쯤 뒤에 맥코너가 돌아왔는데, 표정이, 썩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네기 묻자 그는 약간 화가 난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옳았소. 별로 기분 좋은 사람이 아니더군요. 내 소개를 하면서 누구인지 설명했는데도 악수조차 청하지 않았소. 배에 타고 있는 우리를 상대로 시물탄 게임을 한 판 해주면 우리 모두에게 자랑거리이며 영광이겠다고 열심히 우리 뜻을 설명했지만 그는 허리를 뻣뻣이 세우고 거절하더군요. 유감스러지만 자신의 매니저와 계약상의 의무가 있는데, 순회 시합 기간에 사례를 받지 않고 체스를 두는 것은 엄금 사항이라나. 사례금은 한 판에 최소한 250달러라는 군요."
나는 웃음이 나왔다.
"흑백의 말 한 번 움직이는 게 그토록 좋은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걸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했군요. 그래서 당신은 그냥 정중하게 물러 나왔겠군요."
그러나 맥코너는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시합은 내일 오후 3시에 하기로 했소. 이곳 휴게실에서요. 우리가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길 바라오."
"뭐라고요? 그에게 250달러를 주겠다고 동의했단 말이오?"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안 될 게 뭐요? 그게 그 사람의 직업이잖소. 만일 내가 치통이 있는데 이 배 안에 우연히 치과의사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 이빨을 거저 뽑아달라고 요구하진 않을 거요. 저 사람이 비싼 값을 부른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오. 어떤 분야에서든 실제로 능력을 갖춘 자가 또한 최상의 사업가라오. 나로 말하자면, 사업이 분명하면 할수록 더 좋소. 센토비치 씨가 내게 호의를 베풀어줘서 결국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보다 차라리 현금으로 지불하는 게 낫소. 잘 생각해보니 전에도 우리 클럽에서 하룻밤 사이에 250달러 이상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세계 챔피언과 대결한 것도 아니었소. '삼류'선수가 센토비치 같은 사람에게 진다고 해서 치욕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잖소."
내가 별다른 저의 없이 내뱉은 '삼류 선수'라는 말 한마디가 맥코너의 자존심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혔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 농담 한마디에 비싼 값을 치를 작정이었기에, 나는 그의 터무니없는 공명심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그러한 공명심 덕분에 마침내 진기한 상대인 센토비치와 사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체스를 둔다고 자처해온 네댓 명에게 시합이 임박했음을 서둘러 알렸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지나가는 승객들 때문에 방해받지 않도록 내일의 시합을 위해 우리가 앉을 탁자말고도 옆의 탁자들까지 미리 예약해두도록 했다.
다음날 우리 편 사람들은 약속한 시간에 모두 나타났다. 챔피언과 마주앉을 가운데 자리는 당연히 맥코너의 자리로 배정되었다. 잔뜩 긴장한 맥코너는 독한 담배를 연달아 피워대며 초조하게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친구가 얘기해줘서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세계 챔피언은 족히 10분 이상은 늦게 나타났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등장에 당당한 무게를 주려는 의도였다.
센토비치는 점잔을 빼며 가만히 탁자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당신들은 내가 누구인지 잘 아실 테고,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다'는 무례한 태도로 자기 소개도 하지 않은 채 전문가다운 사무적인 어조로 주요한 게임 규칙을 정하기 시작했다. 이곳 배 안에서는 체스판이 부족해서 시물탄 게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센토비치는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대적하는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은 한 수를 둘 때마다 우리들이 서로 상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구석에 있는 다른 탁자로 가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말을 놓은 뒤 치는 종이 없으니 우리가 대응 수를 두고 나면 수저로 유리컵을 두드리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별다른 안이 없다면 한 수를 두는 제한 시간은 10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마치 겁먹은 학생들처럼 그의 모든 제안에 군말 없이 따랐다. 말의 색깔을 선택한 결과, 센토비치에게 검은 색 말이 주어졌다. 그는 그대로 선 채로 첫 수를 두고 나서 곧장 자신이 제안한 대기석으로 가서 느긋하게 뒤로 기댄 채 그림 잡지를 뒤적거렸다.
그 판의 결과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였다. 스물 네 번째 수에서 우리편의 완전한 패배로 끝이 났다. 세계 체스 챔피언이 실력이 중간치나 될까말까 한 여섯 명의 상대를 왼손 하나로 간단히 싹쓸이한다는 것 자체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왼손 하나로 우리 모두를 처치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너무나도 분명히 느끼게 해준 그 불손한 태도가 불쾌할 뿐이었다.
센토비치는 수를 둘 때마다 매번 체스판을 그저 건성으로 한 번 흘낏 보고 나서, 느긋한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마치 우리 자신을 죽은 말이라도 되는 듯이 대하는 태도였다. 그런 무례한 몸짓은, 다른 곳에 눈길을 무의식적으로 떠오르게 했다. 내 생각으로는 센토비치가 어느 정도 다감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실수를 지적해 준다거나 다정한 말로 용기를 북돋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판이 다 끝난 뒤에도 이 비인간적인 체스 기계는 '체크'(킹에게 '바로 다음 수에 잡겠다'며 공격하는 수로서, 장기로 치면 '장군'과 같은 말이다. 체스에서는 킹을 잡는 게 아니라 킹을 포위를 해서 항복을 받아내야만이 게임이 끝나게 되는데 체크를 건 쪽에서 큰 소리로 '체크'라고 말하며 둔다. 하지만 공식 시합에서는 '체크'란 말을 하지 않아도 무관하다 : 옮긴이)를 부른 뒤에 한 마디 말도 없이 꿈쩍도 않고 탁자 앞에 서서, 또 한 판을 두자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낯두꺼운 무뢰한을 상대할 때 으레 그렇듯이 나는 난감한 마음이 되어, 내 편에서는 적어도 이 내기 한 판으로 우리의 친교는 끝났다는 것을 시사해주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막 일어설 찰라였다. 바로 그때 짜증나게도 내 옆에서 맥코너가 아주 잠긴 목소리로 "복수전!"이라고 말했다.
나는 맥코너의 그 도전적인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바로 그 순간 맥코너는 사실 예의바른 신사의 모습이라기 보다 결전을 앞둔 권투선수 같은 인상을 풍겼다. 센토비치가 우리에게 보여준 불쾌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병적일 정도로 민감한 그의 공명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맥코너는 완전히 딴사람처럼 변했다. 얼굴은 이마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르고 벌름거리는 콧구멍으로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리고 앙다문 입술은 도전적으로 쭉 비어져 나온 턱과 맞닿아 깊은 주름은 하나 만들어놓았다. 나는 그의 눈길에서 그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이 이글거리는 불꽃을 느끼고 내심 불안해졌다. 그것은 마치 도박장의 룰렛 게임기 앞에서 계속해서 판돈을 두 배로 걸었는데 여섯 번째나 일곱 번 가서도 원하는 색깔이 나오지 않을 때의 도박꾼 얼굴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 광적인 야심가가 자신의 재산을 다 날리더라도 센토비치를 상대로 적어도 한 판이라도 이길 때까지는 사례금이 두 배든 세 배든 간에 계속해서 두려 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센토비치는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 동안 수천 달러나 캐낼 수 잇는 금광을 맥코너한테 발견한 셈이었다.
센토비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시죠"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선생님들께서 검은말로 하십시오"
호기심에 찬 몇몇 사람들로 인해 우리 편이 더욱 커지고 활발해졌다는 것 말고는, 두 번째 판도 형세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맥코너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체스 말에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체스판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런 맥코너에게서, 냉혈동물 같은 상대와 대적해서 "체크!"라는 환희의 소리를 지를 수만 있다면 감격에 겨워 수천 달러라도 희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비장한 격정 상태가 무의식중에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전해졌다... 한 수를 놓을 때마다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열띠게 논의를 하였고, 센토비치를 우리 탁자로 불러오는 신호를 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기 일보 직전까지 검토를 거듭하며 말을 쓰곤 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열일곱 번째 말을 두기에 이르렀는데, 우리 자신도 놀랄 정도로 예상치 않게 우리에게 유리한 판세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C파일(체스판을 가로와 세로로 각각 8칸씩 모두 64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세로는 A파일에서 H파일까지, 가로는 1랭크에서 8랭크까지로 불린다:옮긴이)의 폰을 끝에서 두 번째 칸인 C2까지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새 퀸(체스 판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여왕' 말로서 가로․세로․대각선의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 옮긴이)을 잡기 위해서 이 폰을 C1으로 옮겨놓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명백한 기회에도 느긋하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우리에게 유리해보이는 형세도 알고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판세를 내다보는 센토비치가 의도적으로 던진 미끼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한결같이 의심했다. 그런데 기를 쓰며 함께 탐색하고 논의했음에도 우리는 센토비치의 은밀한 술책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우리에게 허용된 제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말을 과감히 움직여보자고 결정했다.
맥코너가 폰을 마지막 칸으로 움직이려고 막 손을 대는 순간, 누군가 갑자기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지면서 "아이고! 그러면 안돼요!" 하고 나지막하면서도 강렬한 어조로 귀뜸을 해주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돌렸다. 가냘프면서도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의 마흔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전에도 갑판 위를 산책하는 그를 본 적이 있는데, 백묵처럼 아주 창백한 이상한 안색이 특히 눈에 띄었었다. 그 사리??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체스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음이 분명했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던지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당신들이 지금 퀸을 두면, 저 사람은 곧장 c1에 있는 비숍(대각선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말:옮긴이)으로 그것을 칠 것이오. 그러니 나이트를 후퇴시키세요. 하지만 그 사이에 저 사람은 자유로운 폰으로 d7으로 가서 당신들의 룩(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움직이는 말로서, 장기로 치면 '차'와 같다:옮긴이)을 위협할 것이고, 당신들이 나이트로 체크를 부르더라도 아홉 번째나 열 번째 말을 두고 나서 당신들의 패배로 판은 끝나게 될 거요. 이것은 1922년 피스티아 대전에서 알예친이 보골류보브를 상대로 처음 써먹은 것과 거의 똑같은 형국이예요."
맥코너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에서 손을 뗀 채 멍한 얼굴로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우리도 생각지도 못한 천사가 도우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크를 부를 것을 아홉 수나 앞서서 미리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일급 체스 전문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면 센토비치와 체스 챔피언 자리를 두고 싸울 경쟁자로서 같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 배를 탄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갑작스레 출현해서 개입한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이었다. 맨 먼저 정신을 차린 맥코너는 "당신 같으면 어떻게 두겠소?"라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곧장 전진하지 말고 우선은 비켜 가세요! 무엇보다도 g8에 있는 킹을 위태로운 파일에서 h7으로 밀쳐놓으세요. 그러면 저 사람은 아마 다른 쪽 측면으로 공격해올 겁니다. 당신들은 룩을 c8에서 c4로 움직여 막아내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이 두 배로 걸리니 폰을 하나 움직여서 우위를 확보하세요. 그렇게 되면 자유로운 폰이 자유로운 폰과 맞서게 되어, 당신들이 방어만 잘 하면 비기게 될 겁니다. 그 이상은 달리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계산은 재빠른 속도 못지 않게 엄밀하기까지 해서 어리둥절한 정도였다. 마치 인쇄된 책을 보며 수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사람의 개입 덕분으로 우리편이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비길 수 있는 뜻밖의 호기를 맞게 된 것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체스판이 그에게 더 잘 보이도록 너나 할 것 없이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맥코너가 다시 한 번 물었보았다.
"그렇다면 g8의 킹을 h7으로 옮길까요?"
"그렇고 말고요! 우선은 피하세요!"
맥코너는 그 남자가 말한 대로 따라 두었고 우리는 유리잔을 두드렸다. 센토비치는 늘 하던 대로 태연하게 우리 탁자로 걸어와서 단 한 번 흘낏 쳐다보는 것만으로 대응 수를 계산해냈다. 그런 뒤에 h2의 폰을 킹 옆의 h4로 움직였다. 우리의 미지의 구원자가 예견했던 수 그대로였다. 우리편의 그 남자는 곧바로 흥분한 목소리로 나즈막히 말해주었다.
"룩을 전진, 룩을 전진시켜요! c8에서 c4로! 그러면 저 사람은 무엇보다도 폰을 방어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그래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걸요! 저 사람의 자유로운 폰은 신경 쓰지 말고 c3의 나이트로 d5를 공략하세요. 그러면 다시 비김수가 될 겁니다. 방어만 하지말고 전면 압박 전략으로 나가요!"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그의 말이 마치 중국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일단 그 남자의 마력에 사로잡힌 맥코너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두었다. 우리는 돌아오라는 신호를 센토비치에게 보내기 위해 또다시 유리잔을 두드렸다. 판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센토비치는 곧바로 두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미지의 그 남자가 우리에게 예견해준 그대로 두고 나서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센토비치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전혀 예상 밖의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센토비치는 눈을 치켜 뜨고 우리 편 사람들을 한 사람씩 유심히 뜯어보았다. 자신을 상대로 누가 이처럼 강력한 방어를 해냈는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눈길이 분명했다.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흥분 상태는 극도로 커져갔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한치의 희망도 없이 체스를 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센토비치의 냉혹한 교만심을 꺾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두 가슴을 두근거리며 극도로 흥분되어갔다. 우리편의 새로운 벗은 이미 다음 수를 지시해줬고 우리는 센토비치를 다시 부를 수 있었는데, 수저로 유리잔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첫 승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줄곧 서서 두던 센토비치는 한참을 멍하니 망설이더니 마침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어색한 듯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는데,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와 우리 사이의 신체적 위상은 이미 사라진 셈이었다. 우리는 그로 하여금 적어도 공간상으로는 우리와 대등한 위치에 마주앉도록 만든 것이었다.
센토비치는 한동안 갚은 생각에 잠겨 꼼짝도 않고 눈길을 체스판 위에 고정시키고 있었기에, 거무스름한 눈꺼풀 아래 있는 그의 두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긴장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 그 모습이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과 대조를 이뤄 약간 멍청한 듯한 이상을 풍기기까지 했다. 센토비치는 몇 분 더 생각한 뒤 말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곧바로 우리편의 그 남자가 소곤거렸다.
"노림수요! 그럴듯한 생각이군요! 하지만 그쪽에는 대응을 하지 마세요! 그냥 맞바꾸기로 밀어붙여요. 반드시 맞바꿔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비길 수 있어요. 신이라도 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 겁니다."
맥코너는 그대로 따라 두었다. 맥코너를 뺀 나머지 우리 편 사람들은 이미 멍한 엑스트라로 전락해 있었고, 그 다음 몇 수에서는 맥코너와 센토비치 사이에 우리로서는 이해조차 안 되는 열띤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일곱 수 정도 지난 뒤에 센토비치는 장고 끝에 "무승부!"라고 말했다.
잠시 동안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문득 파도소리와, 휴게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갑판 위를 걷는 발자국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볍고 부드러운 바람소리도 느껴졌다.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고, 이미 반쯤은 진 거나 다름없는 판에서 이 미지의 인물이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놀라서 얼떨떨한 상태였다.
맥코너는 몸을 홱하니 뒤로 젖혔고, 숨을 죽이고 있던 그의 입에서는 "야아!"하는 환희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다시 센토비치의 표정을 주시했다. 마지막 몇 수를 둘 때부터 이미 그의 얼굴빛은 창백해진 것 같았지만, 센토비치는 곧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뻣뻣한 자세를 고수했고, 체스판에서 말을 조용히 거두어들이면서 마치 지나가는 듯한 말로 물었다.
"세 번째 판도 하시겠습니까?"
센토비치는 아주 사무적으로, 순전히 장삿속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같이 물으면서 맥코너를 쳐다보지 않고, 우리의 구세주를 정면으로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앉은 자세가 안정된 것을 보고서 말이 더 훌륭한 새 기사를 알아보듯이, 센토비치는 마지막 몇 수를 보고서 실제로 자신에게 대적하는 진짜 적수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의 눈길을 좇아서 긴장한 채 그 미지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미지의 남자가 미처 생각하거나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맥코너는 그답게 공명심으로 흥분해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이오! 하지만 이제는 당신 혼자서 저 사람과 둬 보시오! 당신 혼자서 센토비치와 대적해봐요!"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미 말들을 거의 거두어들인 체스판을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던 그 미지의 남자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려 있고 흥분해서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왠걸요, 여러분. 그런 어림도 없는 일이에요.....
나는 전혀 고려 대상도 못 되고......... 20년 동안, 아니 25년 동안을 체스판 앞에 앉아본 적도 없는 데다가....... 허락도 없이 여러분들의 판에 끼어들어 주제넘게 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하고...... 정말 다시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우리가 놀라서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급히 뒤로 물러서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다혈질의 맥코너는 주먹을 치켜올리며 씩씩거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야! 저 사람이 25년 동안이나 체스를 안 두었다니, 당치도 않을 소리! 한 수를 둘 때마다 매번 상대방의 대응수까지 다섯 수, 여섯 수씩이나 미리 앞질러 계산하던데 말이야. 그런 수는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소?"
맥코너는 이 마지막 말을 무의식중에 센토비치를 향해 내뱉었다. 하지만 이 세계 챔피언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냉철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 점에 대해 저는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 없군요. 어쨌든 저 양반은 상당히 낯설고 흥미로운 체스를 두더군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한 판을 져준 겁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서서 사무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저 양반이나 여러분이 내일 또 한 판을 두고 싶으시다면, 저는 3시부터 시간을 비워두겠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센토비치가 우리를 도와준 미지의 신사에게 대범하게 한 판을 져준 게 아니고, 그의 이 말은 자신의 패배를 위장하려는 어리석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토록 한결 같은 교만함이 언젠가는 한번 짓밟히는 것은 보고 싶다는 우리의 욕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평온하고 느긋했던 여객선 승객들에게 갑자기 격렬하면서도 야심에 찬 투쟁 의욕이 솟구쳤다. 대서양 한가운데 바로 이 여객선 위에서 체스 챔피언의 월계관을 빼앗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모든 전신 매체를 통해 전세계로 급히 타전될 대기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도발적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서 우리를 도와준 그 구원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신비스러운 매력도 있었고,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겸손한 그 사람의 태도와 프로 체스꾼의 확고한 자만심이 이루는 대조도 우리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도대체 저 미지의 인물은 누구일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묻혀져 있던 체스 천재가 우연히도 이 여객선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아니면 유명한 체스 챔피언이 불가해한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숨긴 것일까? 이런 모든 가능성을 두고 우리는 갑론을박을 벌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럴듯한 가설도 우리에겐 별로 타당해보이지 않았다. 저 낯선 인물의 수수께끼 같은 수줍음과 뜻밖의 고백을 뛰어난 그의 체스 기술과 조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날로 예정된 시합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조력자가 다음날 센토비치와 시합을 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기로 하고, 그 시합의 물질적인 위험 부담은 맥코너가 떠맡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여객선 승무원에게 물어본 결과, 그 미지의 남자가 오스트리아 사람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내가 우리 모두의 청원을 그에게 전하는 임무를 맞게 되었다.
서둘러서 빠져나간 그 사람을 갑판 위에서 찾아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갑판 위의 의자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나는 그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약간 피로한 듯한 자세로 짧게 깎은 머리를 쿠션에 올려놓고 있었다. 비교적 젊어 보이지만 이상하게 창백한 얼굴이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 눈부시게 흰 머리칼이 관자놀이를 뒤덮고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 남자가 갑자기 나이가 들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곧 공손하게 일어서서 자기 소개를 했다. 그의 성은 고대 오스트리아의 아주 명망 높은 가문의 이름으로서 곧바로 내게 친근감을 주었다. 나는 그 가문의 한 사람이 슈베르트와 아주 절친한 친구였고, 고대 황실의 주치의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센토비치의 도전을 받아들여달라는 우리의 부탁을 전달하자 B박사는 눈에 띄게 당혹해했다. 이것은 방금 전에 둔 체스판에서 그가 영예롭게도 세계 챔피언을, 그것도 현재 가장 전적이 화려한 챔피언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태도였다. 내가 전해준 이 말은 어떤 이유에서든 그에게 특별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그는 상대방이 정말로 공인 세계 챔피언이냐고 몇 번씩이나 거듭 물어봤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런 반응이 내 임무를 덜어줄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민감한 반응을 고려해서 만일의 경우에 패하더라도 물질적인 위험 부담을 맥코너가 질 것이라는 사실을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B박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시합을 해볼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하지는 말아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분명히 전해달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꿈꾸는 듯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왜냐하면 제가 체스를 규칙에 따라 제대로 둘 수나 있을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저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로, 그러니까 20년 넘게 체스 말을 한 번도 안 만져봤습니다. 제가 공연히 겸손 떠느라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세요. 학창 시절에도 체스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아이는 아니었어요."
이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가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여러 체스 챔피언들의 배합 수를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있을까 놀라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최소한 이론상으로라도 체스에 깊이 몰두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B박사는 또다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깊이 몰두했었다고요? 하기야 체스에 깊이 몰두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단 한 번밖에 없을 상황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꽤나 복잡한 이야기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평온하고 위대한 시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얘기를 들어주신다면......"
그는 자기 옆의 갑판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기꺼이 그의 초대에 응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B박사는 독서용 안경을 벗어서 옆에다 치워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당신은 비엔나 사람으로서 저희 가문을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제가 아버지와 함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