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마루프레스 운영자가 [뿌리깊은나무]를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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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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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마루프레스 운영자가 [뿌리깊은나무]를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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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이이화는 역사학자이다. 이 글 '마지막 내시'를 쓸 때는 '민족문화추진회의 연구위원'으로 있었다.
이이화씨는 1937년 대구 출생으로 어려서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20대 이후 혼자 힘으로 40여 년간 한국사를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과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과 '한국의 파벌' 등이 있습니다. - 박인규/프레시안 인터뷰에서
내시는 조선 시대에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빛이 나지 않는, 하지만 꼭 필요한 임무를 맡아 했던 공인이었다.
1970년대까지 조선시대의 내시로 명맥을 이었던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내시는 중국의 고대 왕실에서부터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 환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궁중의 잡무를 맡거나 왕, 왕비가 죽었을 때 염습을 하거나 관을 내리는 일을 했다고 한다. 1392년에 내시의 정원은 약 240명 정도였고, 직급은 종2품부터 사령에 까지 다양하다고 했다. 내시의 일은 음식 관리, 왕의 명령을 전달, 궁중의 수위와 궁중의 청소 등이라고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의 거처에 허락없이 드나들 수 있고, 왕과 늘 가까이 있었던 탓에 그 권력이 몹시 커지게 되었다. 내시가 되는 경로도 선천적인 이유와 후천적인 이유가 있었다. 내시는 남성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명색이 남자인 사람들이었으며, 내시의 수급은 '고자'인 어린이의 부모가 궁중에 들이기 위해 연줄을 대거나 돈을 쓰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로 어린 자식을 일부러 내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대가 만든 비극이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기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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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이이화는 역사학자이다. 이 글 '마지막 내시'를 쓸 때는 '민족문화추진회의 연구위원'으로 있었다.
이이화씨는 1937년 대구 출생으로 어려서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20대 이후 혼자 힘으로 40여 년간 한국사를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과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과 '한국의 파벌' 등이 있습니다. - 박인규/프레시안 인터뷰에서
내시는 조선 시대에 왕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빛이 나지 않는, 하지만 꼭 필요한 임무를 맡아 했던 공인이었다.
1970년대까지 조선시대의 내시로 명맥을 이었던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내시는 중국의 고대 왕실에서부터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 환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궁중의 잡무를 맡거나 왕, 왕비가 죽었을 때 염습을 하거나 관을 내리는 일을 했다고 한다. 1392년에 내시의 정원은 약 240명 정도였고, 직급은 종2품부터 사령에 까지 다양하다고 했다. 내시의 일은 음식 관리, 왕의 명령을 전달, 궁중의 수위와 궁중의 청소 등이라고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의 거처에 허락없이 드나들 수 있고, 왕과 늘 가까이 있었던 탓에 그 권력이 몹시 커지게 되었다. 내시가 되는 경로도 선천적인 이유와 후천적인 이유가 있었다. 내시는 남성 구실을 하지 못하는 명색이 남자인 사람들이었으며, 내시의 수급은 '고자'인 어린이의 부모가 궁중에 들이기 위해 연줄을 대거나 돈을 쓰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유로 어린 자식을 일부러 내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대가 만든 비극이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기록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