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는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가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란이 일어날 때---대중 시위이든 무장 봉기이든 혹은 총파업이든---노동자 계급의 의식 변화는 놀랍다. 이전까지 오만가지 일로 산만해져 있던---고스톱 치는(원문에는 대마초 피우는 일로 되어 있음--옮긴이) 것에서부터 텔레비젼을 보는 것까지---노동자의 정신적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데로 급격히 모아진다. 그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놀라운 천재적인 해결 방안을 만들어 내는데, 마치 사태의 진전에 지배계급이 당황해 하는 것처럼, 이 해결 방안은 기존 혁명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인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인쇄공 파업 기간 동안에 세워진 파업위원회로부터 발전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당---혁명적 사회주의자 가운데서도 가장 전투적인---도 소비에트를 불신했다. 다시 말해서, 볼셰비키들은 이전까지 비정치적이었던 노동자 대중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기구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한 경험은 많은 파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기존의 투사들은 자신들의 충고를 그렇게 오랫 동안 무시해 온 노동자들이 갑자기 스스로 전투적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할 때 완전히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러한 자발성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만 믿고---무정부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아류와 같이---혁명 정당이 필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잘못이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실로 대단히 빠르게 자신들의 관념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관념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모두 바꾸지는 못한다. 모든 파업, 모든 시위, 모든 봉기의 내면에는 언제나 계속되는 찬반 양론이 있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노동자 계급의 사회 운영을 위한 서곡이라고 볼 것이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이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중도적인 노동자들은 찬반 양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제도 언론을 동원하여, 행동하는 측의 노동자를 비난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지원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또한 경찰이건, 군대건, 우익 조직이건 가리지 않고 파업 파괴를 위한 물리력을 동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측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계급투쟁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찬반 양측 주장에 대해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투쟁 속에서 심화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만 하며, 그럴 때에만 노동자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투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직은 자연발생적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이 계속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서 건설된다. 단순히 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 이념들을 일상적인 계급투쟁, 즉 파업, 시위, 캠페인 등에 적용함으로써만 노동자들은 사물을 변화시키기 위한 힘을 의식할 수 있으며, 변화에 대한 믿음을 얻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사회주의자 당의 개입은 결정적일 수 있다. 즉, 변화를 추구하고, 혁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하며,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는 노동계급이 승리하도록 계급투쟁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정당인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당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당은 계속해서 계급투쟁과 관련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당원들과 당의 지지자들과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 지도부는 언제나 투쟁의 집단적인 경험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적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만이 아니라 당내의 끊임없는 토론---당이 바탕을 두고 있는 사회주의 이념과 계급투쟁 경험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또한 중앙집중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적 사회주의 당은 토론 모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당이기 때문이다. 당은 계급투쟁에 집단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하고,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당의 이름으로 일상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도부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정부가 파업 자위대 연행을 명령한다면 당은, 민주적 결정을 우선시하여 회의를 소집할 필요 없이, 즉각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정은 중앙이 내리고 집행한다. 민주주의는 그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느냐 아니었느냐 하는 것을 밝힐 때 사후에 발휘된다. 만약 중앙의 결정이 투쟁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당 지도부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은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제 사이의 섬세하고 정교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은 자기를 위햐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투쟁에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 투쟁 수준이 낮고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노동자들이 거의 없을 때, 당은 왜소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모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원을 늘리기 위해서 정치적 이념을 희석시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이 상승할 때, 상당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관념을 급속히 바꿀 수 있고, 그리하여 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당은 문호를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은 방관자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당은, 계급의식이 가장 투철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통일키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계급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또한, 당이 (노동)계급한테 명령할 수도 없다. 당이 스스로를 지도부라고 단순히 선언할 수 없다. 즉, 당은 실천---작은 파업에서 혁명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정확성을 입증함으로써 그러한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 당이 사회주의를 가져온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부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을 스스로 통제하고 이러한 통제력을 사회 변혁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 올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사회주의라는 섬을 건설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살고자 했던 여러 소집단들의 시도는 결국 언제나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압력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집단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노동자 계급으로부터도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타락시키면서 낳은 결과---인종 차별, 성 차별, 착취, 야만 행위---에 맞서서 날마다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의 힘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1 제국주의와 민족해방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틀어 사용자 계급은 언제나 부를 추가로 얻는 원천---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부의 탈취---에 눈을 돌려왔다.
중세 말기에 자본주의의 최초 형태가 성장함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이 광범한 식민 제국을 침탈했다. 그래서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 네덜란드와 프랑스 제국, 대영 제국이 등장했다. 지금은 가끔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전체가 파괴되었던 반면, 서유럽 지배계급 수중에는 부가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나서 유럽에 금이 대량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카 사회 전체는 파괴되었고 아메리카에 살던 모든 민족들은 노예가 되었다. 예컨대, 콜롬버스가 최초로 정착지를 세운 아이티에서는 토착 원주민인 하라와크 인디언(전부 합해서 50만 명 정도)이 겨우 두 세대만에 씨가 말랐다. 멕시코의 원주민 인구는 1520년 2천만 명에서 1607년 2백만 명으로 줄었다.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 일부의 원주민 인구의 감소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서 지긋지긋한 조건 속에서 대서양을 건너 수송된 노예들로 메워졌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약 900만 명의 노예가 수송도중에 죽었고, 대략 1500만 명의 노예가 살아남았다. 절반 정도의 노예가 영국 배로 수송되었는데, 그것은 영국 자본주의가 산업발전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이유였다.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부는 산업의 재원(財原)이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브리스톨(Bristol: 영국 서남부의 항구 도시--옮긴이)의 성벽은 흑인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다른 항구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 임금 노동자를 속박하는 은폐된 노예제는 그 토대로서 신세계(아메리카 대륙)에서 노골적인 노예제를 필요로 했다."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처럼, 노예 무역은 노골적인 약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벵골(인도의 도시: 지금은 방글라데시 지역--옮긴이)은 최초의 영국인 방문객들이 그 문명의 훌륭함에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벵골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다. 맥콜리(Macauley) 경이 정복자 클라이브(Clive)의 전기에서 썼던 바와 같이, "거대한 인구가 희생양 신세로 내몰렸다. 이리하여 엄청난 부가 캘커타에 쌓였다. 반면에, 3천만의 인간이 무지무지하게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다. 그들은 학정에 시달리며 사는데 익숙해 있었지만, 이런 학정에 시달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때부터 벵골은 부유함으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몇 년 마다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굶어죽는 가혹한 빈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가난으로 유명해졌다. 그 동안 영국의 총 투자 자본이 겨우 6~7백만 파운드밖에 안 되었던 17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으로 해마다 강제징발된 공물은 2백만 파운드나 되었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떨어졌다. 대기근이 찾아들어 아일랜드 인구가 기아와 이민으로 반으로 줄어든 1840년대말에, 영국 지주 부르주아지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를 먹여살리기에 충분하도고 남을 만큼의 식량을 아일랜드 지대로 가져갔다.
오늘날에는 세계를 보통 "선진국"과 "발전도상국"으로 나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전도상국들이 수백 년 동안 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선진국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구 국가들이 "발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머지 국가들이 부를 강탈당하고 퇴보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발전도상국의 많은 사람들이 300년 전에 비해 오늘날 더 가난하게 살고 있다.
마이클 배럿 브라운(Michael Barret Brown)에 따르면, "인도와 중국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저발전 국가들의 국민들이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1인당 부는 17세기에는 유럽보다 높았지만, 서유럽에서 부가 증가함에 따라 그 이하로 떨어졌다."
영국은 하나의 제국(empire)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공업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은 세계의 3분의 1에 달하는 자기 제국 안에 있는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 만한 위치에 있었다.
독일, 일본,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새로운 공업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들 국가들도 이런 이점들(즉, 원료, 시장, 이윤이 높은 투자 영역 등)을 갖고 싶어 했다. 이들 국가는 자기 제국 그러니까 "영향권"(식민지--옮긴이)을 건설했다. 경제 공황에 직면한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서로 상대방 국가의 "영향권"을 침입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세계 대전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대전은 역으로 자본주의의 내부 조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인 국가는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국가는 외국과 벌이는 경쟁과 전쟁에 대비하여 산업을 재조직하기 위해 대기업들과 훨씬 더 긴밀하게 유착했다. 자본주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발전은 자본가들이 자국 노동계급을 착취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힘으로 지배하고 그 나라 민중을 착취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는 식민지 국가들의 억압받는 계급의 편에서 보면, 그들이 식민지 내부의 지배계급한테 착취당할 뿐 아니라 외국의 제국주의자들한테도 착취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식민지 나라들 내부의 지배계급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계급은 자국 민중을 착취할 수 있는 기회가 대부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현지 산업의 급속한 발전이 좋은 출세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기대했던 식민지 중간계급들도 고통을 받았다.
지난 70여년 동안, 식민지 국가와 예전에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이들 모든 다양한 계급은 제국주의의 영향에 반대하여 떨쳐일어서 왔다. 외국의 제국주의 지배에 대항하여 전인민을 단결시키려는 운동이 발전해 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내걸었다.
- 외국 제국주의 군대의 철수
-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주 분할 등에 반대하여, 단일한 민족 정부를 중심으로 전민족적인 영토의 통일
- 외국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외국어에 반대하여 일상 생활에서 토착언어 부활
- 국내에서 생산된 부를 그 나라의 '발전'과 '근대화'를 가져올 국내 산업 확장에 이용
이런 요구들이 중국(1912년: 신해혁명, 1923~1927년: 국민혁명, 1945~1948년: 국공내전), 이란(1905~1912년, 1917~1921년, 1941~1953년), 터키(1차대전 후), 서인도 제도(1920년대 이후), 인도(1920~1948년의 대영 독립 운동), 아프리카(1945년 이후), 베트남(미국이 패퇴한 1975년까지), 그리고 오늘날 남아프리카 등에서 지속적인 혁명 봉기의 요구였다.
이러한 혁명운동은 식민지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일부가 주도하곤 했다. 이러한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이 자국 노동계급은 물론 또 하나의 적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른바 "제3세계"의 민족 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자본가 국가들에 도전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한테 제3세계 민족 운동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제3세계의 민족 해방 운동과 동맹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오늘날 영국의 쉘 석유 회사의 노동자는 쉘 석유 회사가 남아프리카에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양도하라고 싸우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해방 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갖고 있는 셈이다. 만약 쉘 석유 회사가 제3세계 해방 운동을 쉽게 저지할 수 있게 되면, 쉘 석유 회사는 영국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는 싸움에서 훨씬 더 강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제3세계 국가의 민족 해방 운동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고 있지 못할 때에도, 그러니까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부가 단순히 외국의 지배를 국내 자본가 계급이나 "국가자본가"(state capitalist) 계급의 지배로 바꿔치기하기만 원한다고 하더라도 적용된다.
그러한 해방 운동을 분쇄하려 하는 제국주의 국가는 서구 노동자 최대의 적이기도 한 바로 그 제국주의 국가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억업하는 민족은 그 자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레닌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갖지 않았더라도 "제3세계"의 억압받는 인민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 동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는 나라의 비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방향에 동의할 것(노동조합 지도자가 파업을 지도하는 방법에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억압받고 있는 식민지 인민들을 적으로 대하는 그들의 지배계급을 너무나 쉽게 지지하는 셈이 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민족 해방 투쟁이 지도되는 방식을 비판하기에 앞서 무조건적으로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억압받고 있는 나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문제를 그런 수준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언제나 민족 해방 투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펴밝혀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영구혁명론 속에 포함되어 있다. 트로츠키는 중간 계급 혹은 심지어 상층 계급의 사람들이 때떄로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계급이나 집단을 짓누르는 여러 가지 멍에들 가운데 하나라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이 그러한 투쟁을 일관성 있게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력한 대중 투쟁이 외국이 가하는 억압에만 도전하지 않고 가장 심한 억압을 당하는 계급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려는 그들 자신의 위치에 도전할 경우, 상층 계급이나 중간 계급 사람들은 이러한 대중 투쟁을 용갑하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투쟁이 어떤 일정한 수위에 이르면, 그들은 자기들이 주도하던 투쟁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대중 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외국 지배자들과 손을 잡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 세력이 민족 해방 투쟁의 지도력을 갖지 못하면, 투쟁은 실패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또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소수일 뿐이며, 때로는 아주 극소수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종종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매우 크고(예컨대, 인도와 중국에서 노동계급은 수천만 명의 숫자를 가진 강력한 세력이다), 또한 그 수에 비하여 그 나라 부의 거대한 몫을 만들어 내며, 그 나라를 지배하는 데 핵심 부분인 도시 지역에 압도적인 숫자가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 노동계급은 다른 피억압 계급에 대해 지도력을 가질 수 있고 전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다. 혁명은 민족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적 요구로 끝을 맺을 때 영속적(permanent)일 수 있다. 억압받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계급적 기초 위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할 때에만, 바로 그 때에만---물론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일반적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의 지도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경고를 한다면---민족 해방의 요구로 시작되어 사회주의 요구로 끝을 맺는 영구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그리고는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된다. 물론, 완전한 사회주의는 몇몇 주요 선진국을 포함한 국제적 규모에서만 이룩될 수 있지만, 미해결의 민족·민주적 과제가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민중 권력---노동자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수립과 구질서의 철저한 청산을 통해 완결될 수 있따는 점에서 2단계 혁명론인 반제·반봉건 민중민주 "혁명"론 및 반제·반독점 민중민주 "혁명"론과 구별된다. 신흥공업국의 영구혁명 전략은 반국가·반자본 일반인데, 여기서 '반자본 일반'이란 모든 자본을 사회화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라, 영구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의 대소를 구별하여 투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민중 권력 수립 후의 사회화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대규모 사유재산 및 생산적인 사유 재산에 한정된다.--옮긴이)
12 마르크스주의와 여권운동(페미니즘)
여성 해방에 대해 지금까지 줄곧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 방법---'여권운동'(feminism)과 혁명적 사회주의---이 존재해 왔다.
'여성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여성 운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권운동'은,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 그러니까 남성의 생리 구조와 심리 구조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만---"해방된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여권운동'가들이 따로 조직을 만드는 식의 완전 독립이건, 아니면 여성 위원회나 여성 간부 회의, 여성 문제 전담 기구 식의 부분적인 독립이건---여성 해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후자의 부분적인 독립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회주의자 '여권운동'가(socialist feminist)라고 부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 여권운동'론이 여성 운동 내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완전 독립론은 줄곧 약간 진보적으로 사회 봉사를 하는 진영 정도에 머물러 왔다. 체제에 도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의 이러한 도피는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체제 도전의 회피는 더 많은 '여권운동'가들을 다른 방향으로---보수 야당으로---몰려가게 했다. 적합한 자리---국회의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 의회 의원---를 올바른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차지하는 것이, 모든 여성들이 남녀 평등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은 매우 다른 이념 체계에서 시작된다. 이미 1848년 저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여성에 대한 억압은 남성들의 머리속 관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사유 재산의 발달과 그에 따른 계급에 기초한 사회의 출현으로부터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기 위한 싸움---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한 공장 제도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민중의 생활, 특히 여성들의 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들은, 계급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그들을 배제시켜 왔던 사회적 생산의 장(場)으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에게 그들이 이전까지 결코 가져 본 적이 없는 잠재력을 부여했다. 집단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여성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상당한 능력과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가족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 때문에 여성이 가장---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던 이전의 여성의 생활과 크게 대조되었다.
이로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물질적 기초, 그러니까 여성을 억압하는 물질적 기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들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에서 오는 이익을 여성들 자신이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의 억압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조직되는 방식---특히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 자식들을 다음 세대의 노동자가 되도록 부양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가족이라는 특정한 틀을 이용하는 방식---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남성들에게---때로는 여성들에게도---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반면, 여성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들의 남편이나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노동자로서 같은 일을 하도록 양육하는 데 그들의 삶을 바칠 것이라는 사실은(자본가 계급으로서는--옮긴이) 커다란 이익이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여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가족 안의 많은 역할(가사노동--옮긴이)을 사회가 떠맡게 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그들의 계승자들이 '가족 제도 폐지'를 설파하려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제도 지지자들은 언제나 가족 제도 속에서 가장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족 제도 폐지'가 그들의 남편에게 자식에 대한 책임을 방기할 수 있다는 면책권과 자신들을 버릴 수 있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 철폐론자들과는 달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더 나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서 여성들이 오늘날의 가족 제도가 부과한 비참하고 답답한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항상 노력해 왔다.
'여권운동'가들은 언제나 이러한 식의 분석을 거부해 왔다. 그들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여성들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곳---노동 속에서 집단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곳---에 있는 여성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피해자로서 여성들에게 접근한다. 예컨대, 1980년대 초의 캠페인은 매춘, 강간 또는 에이즈와 핵무기가 가족과 여성에게 가하는 위협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것들은 여성들이 약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권운동'은 성적 억압이 계급 분화에 우선하며 계급적 구분을 초월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일부 여성들---소수---의 지위를 개선하는 반면, 계급 사회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는 결론들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여성운동은 "신 중간계급" 여성들---언론인, 작가, 강사, 상층 화이트칼라 노동자---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타이피스트, 서류정리원, 기능사원들은 배제되었다.
여성 해방 문제가 단지 소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해 현실화되는 것은 급진적 변화와 혁명적 봉기의 시기에 비로소 그렇게 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여성들한테 그전까지 세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이혼, 낙태, 피임이 자유로워졌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사회의 책임이 되었다. 여성들이 더 넓은 선택 기회를 누리고 자신의 생활을 관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공동 식당, 세탁소, 탁아소 등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러한 진보의 운명이 혁명 그 자체의 운명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굶주림과 내전, 이로 인한 노동계급의 대량 사망, 국제 혁명의 패배는 결국 러시아 자체 안에서조차 사회주의의 실패를 뜻했다. 평등을 향한 변화는 거꾸로 되돌려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화국 초기는 가장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여성 해방 전망은 훨씬 더 밝다. 영국에서는---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이지만---5명의 노동자 가운데 2명이 여성이다.
여성 해방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으로만 이룩될 수 있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독립된 조직이라는 '여권운동가'의 관념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통일된 혁명 운동의 일부로서 함께 행동하는 여성·남성 노동자만이 계급 사회를 타파하고 그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
13 사회주의와 전쟁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1천만 명이 죽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5천5백만 명이 죽었으며,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2백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핵무기를 갖춘 두 개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이제 인류를 여러 번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기존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소름끼치는 일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인간이 사람들을 대량 살륙하는 것을 즐기는 천성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언제나 전쟁을 해 왔던 것은 아니다. 고든 차일드는 석기 시대 유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초의 다뉴브족은 평화스런 종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사냥 도구들이었다. 그들의 마을은 군사 방어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신선기 시대 후기에는 무기가 가장 두드러진 품목이 되었다."
전쟁은 인간의 타고난 침략성(공격성)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전쟁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된 결과이다. 5천년~1만년 전, 재산을 소유한 계급이 최초로 나타났을 때, 그 계급은 자신의 부를 지킬 수단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 계급은 사회의 여타 부분과 분리된 무장 세력 그러니까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사회를 약탈하여 부를 더욱 늘리는 데 국가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다.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하는 것은, 전쟁이 인간 새활의 영원한 특징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계급은 더 많은 노예를 공급해 주는 전쟁을 계속 벌이지 않았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의 봉건 영주들은, 자기 지역의 농노를 다스리고 다른 봉건 영주들한테서 빼앗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무장을 해야 했다.
300~400년 전 최초의 자본가 지배계급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너무 자주 전쟁에 의존해야 했다. 그들은 옛 봉건 지배자들의 잔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처절한 전쟁을 해야 했다. 영국과 같은 가장 성공을 거둔 자본주의 국가들은, 바다를 건너 가서 인도와 아일랜드를 약탈하고, 수백만명의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수송하고, 전세계를 그들 자신을 위한 약탈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전쟁을 통해 건설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전쟁은 "불가피하고 심지어 정당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전쟁에 의존할 수만은 없었다. 자본주의의 부(富)의 대부분은 공장과 광산의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모국" 그 자체 내애세ㅓ 투쟁이 벌어지면 붕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각국의 자본가 계급은 외국에서는 전쟁을 치르는 반면, 국내에서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한편으로는 "군인 정신"을 가지라고 고무하면서, 또한 "폭력"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모순된 방식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과 평화주의적 언사를 혼합시키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전쟁 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보다 더 중심적인 사안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서로 경쟁하는 많은 소기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는 이들 자본가 상호간의 관계 및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규제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기구였다. 그러나, 20세기에는 대기업들이 대부분의 소기업들을 집어삼켰고, 그리하여 각 산업에서 대부분의 경쟁(가격 경쟁)은 배제되었다. 경쟁은 점점 더 각국 대기업들간의 국제 경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쟁을 조정할 국제적 자본가 국가는 없다. 그 대신 각국은 자국 자본가들이 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에 대해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각국 자본가들간의 생사를 건 싸움은, 파괴적 무기를 엄청나게 가진 각 자본주의 국가간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두 번씩이나 세계 대전으로 비화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은, 전세계의 지배를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투쟁, 그러니까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냉전은 가장 강력한 자본가 국가들이 각각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서로 결집하여 대치한, 세계 대전의 변형된 연장이었다.
이러한 전세계적 냉전에 덧붙여져, 많은 열전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반으로 그러한 열전은 1980년에 터진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이 누가 특정 지역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동서 양대 진영이 첨단 군사 기술을 제3세계 국가들한테 팔아 전쟁에 불을 붙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소름끼치는 현실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원하지만 전쟁은 싫어한다. 그들은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다른 대안을 찾으려 한다. 예컨대, 국제연합(UN)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UN은 단지 전쟁 추구를 구체화하는 국가들이 서로 만나는 무대일 뿐이다. 거기서 그 나라들은, 마치 한차례 격돌을 벌이기 전에 탐색을 하는 권투 선수들처럼, 서로의 힘을 비교한다. 만약 한 나라나 어느 동맹이 다른 나라나 동맹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면, 양측은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에 의심이 든다면,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즉 전쟁으로 가는 길만을 알 뿐이다.
이것은 두 개의 거대한 핵 동맹국인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서방측이 동구권에 비해 군사적으로 우세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그 간격을 절장적으로 불리하다고 믿을 정도로 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인류의 대부분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핵전쟁을 감행하여 승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본주의와 영구히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초강대국 미·소간의 협정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양측의 상호불신은 그러한 협정의 효력을 감소시켰다. 양측은 상대가 무기 경쟁에서 자신을 압도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두려워하여 여전히 대량 파괴를 위한 더 우수한 무기를 개발하려 했다. 동서 양진영의 핵무기를 제한할 것이라 여겨졌던 1972년의 협정도 무기 경쟁의 가속화를 막지는 못했다.
1989년에 동유럽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고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함에 따라 냉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질서'와 '평화분담금'을 떠벌였다.
그러나 사태는 이와 정반대로 흘러갔다. 서방이 자신의 옛 동맹국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옛 소련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전쟁을 벌였고, 소말리아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야만스러운 전쟁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군사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모든 곳에서 지배계급은 전쟁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민족주의에 붙잡아매는 길임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을 혐오하고 두려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 전쟁은 계급 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전쟁의 위협은 기존 지배자들한테 평화를 구걸한다고 해서 종식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계급 사회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 싸우는 운동을 통해서만 지배자들을 무장 해제시킬 수 있다.
1970년대 말에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평화운동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쪽만의 무장 해제와 핵동결을 위해 크루즈 미사일과 퍼싱 미사일의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과 별개로도 평화를 위한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 즉 노동계급을 동원하지 못했다.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