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있는 "자유"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 부르주아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 부르주아지) 중세의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 마치 당시의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농노나 노예)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사람이 아무도 없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목양장(牧羊場) 만들 있게 법령--옮긴이)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있게 여유를 가질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 대해 '정당한 가격'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 주고,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있게 해준 "희생"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 이윤율" 10%라고 발표하는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 원료 비용 임금을 지불하고도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 후에 회사가 1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 총이윤을 보게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투자액과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 후에 배로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 증대시켰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가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쏟아낼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 발휘하는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필요한 ()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적다. ,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라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것이다. , 그들에 따르면 (화폐)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 비밀,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명도,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 여기기도 하는 ,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상쾌한 기분으로 열심히 일을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들은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답은 쉽게 찾을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도구들도 역시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 그들은 사실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 대항하여 바로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 ()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대신에,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기계를 많이 투자할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 많은 노동() 많은 자본을 만들어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배의 노동의 산물을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책상을 만드는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 평균 수준의 숙련도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등에 많은 노동( 혹은 시간) 들었기 때문이다.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가지 요점이 있다. 어떤 상품들의 가격은 날마다 또는 주마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런 변화(가격 변화) 상품들을 생산하는 필요한 노동량의 변화(가치의 변화) 외에도 다른 많은 요인들 인해 일어날 있다.

  브라질에 서리가 내려 모든 커피 작물이 죽었을 , 전세계적으로 커피가 값이 폭등했다. 만일 내일 어떤 천재지변이 멕시코의 모든 텔레비젼을 파괴한다면, 텔레비젼 값이 똑같은 식으로 오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제학자들이 수요와 공급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와 같은 가격 변동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많은 친자본가적 경제학자들이 노동 가치 이론은 "말도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수요와 공급만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말도 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주장은 물건 값이 오르내릴 그것은 평균적 수준을 중심으로 오르내린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의 수면은 조수 때문에 높아지고 낮아지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해수면"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일정한 지점을 말할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목에 대하여 홈페이지 주인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앞의 해수면에 관한 설명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여러 상품들 사이에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하는 데는 아무런 설명도 해줄수 없다. 예를 들자면 지우개 5개와 공책 한개가 어떻게 같은 가치로 평가되어 교환이 가능한지 같은 경우에 대해서 그러한 비율로 교환이 되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격이 매일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사실을 가격이 오르내리는 중심으로서 일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모든 텔레비젼이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파괴된다면, 처음에 생산되는 신품은 수요가 아주 많을 것이므로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더욱더 많은 물건이 시장에 나와 서로 경쟁하게 되면, 결국 텔레비젼 가격은 하락하여 그것을 만드는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표시된 그것의 가치에 가까워지지 않을 없을 것이다.
 

  경쟁과 축적

  자본주의가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체제인 것으로 보였던 시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착취에 지배되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했을 때에도 그것이 이런 사정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산업 자본주의는 어떤 유용한 목적을 위해 이런 고된 노동과 착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소수의 기생적 귀족을 위한 사치품과 죽은 군주를 위한 사치스런 무덤을 만들거나 황제의 아들이 신이 저버린 후미진 곳을 지배하기 위한 쓸데없는 전쟁에 거대한 양의 부를 낭비하는 대신에, 산업 자본주의는 많은 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들을 생산하는 부를 사용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산업, 도시, 운송 수단이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꿀 수도 없었던 규모로 성장한 시기였다.

  오늘날은 이상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영국의 올드햄, 핼리팩스, 빙글리와 같은 고장은 기적의 산실이었다. 인류는 전에는 결코 그렇게 많은 원면과 양모가 그렇게 빠리 수백만 명의 옷을 만들 있는 옷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적이 없었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가진 어떤 특별하 미덕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한 노동에 대해서 있는 대로 적게 지불함으로써 자기들의 손에 많은 부를 얻는 데만 사로잡혀 있는, 언제나 매우 유해한 사람들이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많은 지배계급들(노예 소유주, 영주 ), 산업을 건설하지 않았을 , 이런 점에서 자본가들과 흡사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이전의 지배계급과 달랐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것인데, 자본가들은 노동자(피착취 직접 생산자)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자들한테 그들의 일할 능력,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시간당으로 지불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임금 노예"들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노동자들이 생산해 재화를 자기들 스스로가 소비하지 않았다. 봉건 영주는 농노가 생산해 고기, , 치즈, 등을 '직접 소비'하며 살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재화를 다른 사람들한테 '팔아서' 살았다. , 시장에서 상품 팔아 이윤을 얻으며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노예 소유주 개인이나 봉건 영주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행할 있었던 자유보다 작은 자유를 자본가 개인에게 주었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것을 있는 대로 싸게 생산해야 했다. 자본가는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에서는 전지전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힘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공장들과 경쟁 필요에 굴복해야 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자본가, 비룡 그룹의 김덕배 회장(브라우닝 브라우니 경을 이렇게 번역했음--옮긴이) 예로 들어 보자. 그의 공장에서 생산된 일정량의 면포가 만들어지는 10시간의 노동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다른 어떤 공장은 5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의 면포를 생산할 있었다고 하자. 김덕배 회장은 면포에 대해 10시간의 노동과 똑같은 가격그오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면포가 있는데도 비싼 가격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업을 있기를 원하는 자본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있는 대로 빨리 일하도록 확실히 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다른 자본가들한테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단위 시간당 많은 상품을 생산할 있도록 가장 최신의 기계를 갖고 일을 하게끔 해야 했다. 사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자본가는 많은 생산수단 소유해야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을 축적해야 했던 것이다.

  자본가들간의 경쟁은 그들 모두를 속박하는 시장 체제라는 하나의 힘을 낳았다. 경쟁은 자본가들이 항상 노동 과정을 가속시키도록 강요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계에 그들이 투자할 있는 최대의 자본을 투자하게 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있는 최저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만 새로운 기계를 구비할 있었다.(물론 한편으로는 자기들 자신의 사치품도 있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는 주요 저작인 『자본론』에서 자본가는 구두쇠처럼 점점 많은 부를 얻는 골몰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구두쇠한테는 단순히 독특한 개성인 탐욕이 자본가한테는, 그가 단지 여러 바퀴 중의 하나일 뿐인 사회 구조(메커니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자본가로 하여금 일정한 산업 부문에 투자된 자본의 양을 계속 증대시키지 않을 없게 만들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인 경쟁이 개개 자본가들한테 외부의 강제적 법칙으로서 느껴지도록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의 자본을 증식시키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자본가는 누적적 축적을 통해서만 그의 자본을 증식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시다!

  생산은 인간의 욕구---심지어 자본가 계급의 인간적 욕구--- 충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있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은, 다른 기업주들보다 빨리 축적하려는 고용주들의 욕구에 자기들의 삶이 지배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처럼, "부르주아 사회에서 노동은 죽은 노동(생산수단--옮긴이) 축적하는 수단일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노동자--옮긴이) 종속되어 있고 아무런 개성도 없는 반면,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고 있다."

  자본가들이 다른 자본가들과 벌이는 경쟁에서 자본을 축적하지 않을 없도록 하는 압력은, 자본주의 체제 초기의 산업의 급속한 진보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밖의 다른 문제가 결과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반복되는 경제 공황이었다. 공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6 경제 공황

 

  "한편에서 부의 축적, 다른 한편에서 빈곤의 축적"---마르크스는 말로써 자본주의가 가진 경향을 요약했다. 모든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벌이는 경쟁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도록 하면서도 있는 대로 낮은 임금을 지불한다.

   결과,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대폭적인 증대'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된 노동자 수와 임금의 제한된 증대' 사이의 불비례 현상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경제 공황의 기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살펴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갈수록 양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상품을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그들이 자기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임금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금 인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인 이윤을 감소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기업이 생산된 상품을 없다면, 기업은 공장문을 닫고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 그러면 임금으로 지출되는 총액은 훨씬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자기들의 상품을 없게 된다. "과잉 생산" 위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구매할 없는(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상품들이 경제 전반에 걸쳐 쌓이게 된다.

  이것은 지난 170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재치 있게 옹호하는 자들은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쉬운 길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에 따르면, 필요한 모든 것은 자본가들이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그들의 이윤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규 투자는 노동자들한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고, 이번에는 이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팔리지 않는 상품을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규 투자가 있는 생산된 모든 상품은 팔릴 있고 자본주의 체제는 완전 고용을 이룰 있다고 주장함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계속 투자하게 만드는 경쟁 압력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임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쟁 압력이 있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자기들의 모든 이윤을 언제든지 투자하려 것인가 하고 물었다. 자본가는 "합당한" 이윤이 보장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상품에 투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그의 돈을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은행에 넣어 두고 있을 것이다(아니면 투기나 사채놀이를 것이다).

  자본가가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가 경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경제 상황이 좋아 보이면, 자본가들은 모두 동시에 투자하기 위해 덤벼들어 건설부지를 찾고, 기계를 구입하고, 원자재를 찾아 지구를 샅샅이 뒤지고, 숙련된 노동을 돈을 특별히 주고 쓰는 서로 부딪쳐서 나자빠질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소위 "호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 원자재, 숙련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광기어린 경쟁은 그것들의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기업들은 그것들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올라 자기들의 모든 이윤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음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투자 붐이 갑자기 투자 위축으로 바뀐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공장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설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아무도 새로운 기계를 사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계 도구 산업이 공황에 직면한다. 아무도 생산되고 있는 철과 강철을 사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강 산업의 가동률이 갑자기 평균 수준 훨씬 이하로 떨어지고, 이윤이 남지 않게 된다. 폐업과 조업 중단이 전산업으로 파급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다른 산업 부문의 상품을 있는 구매력이 대폭 하락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에서는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품 더미가 썩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장 밖에서 실직한 노동자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머리가 돌아버릴 듯한 상태 그러니까 주기적 공황이 거듭되어 역사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과잉 생산" 위기를 주기적으로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무계획적이므로 자본이 갑자기 투자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것을 중단시킬 아무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가가 이런 위기를 중단시킬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적 투자가 떄는 국가 투자를 늘리고 사적 투자가 너무 많은 때는 국가 투자를 줄이는 식으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함으로써, 국가는 생산을 고르게 안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투자 역시 바보 같은 짓에 속한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를 보라. , 많은 철강을 싸게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현대식 자동 용광로 때문에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철강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국은 이러한 대규모 투자 계획에 착수했던 유일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독일, 미국, 브라질, 동유럽, 심지어 한국조차 똑같이 투자를 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강철이 남아돈다. , 과잉 생산 위기인 것이다. 국가 투자는 감축되고 있다.

  물론, 철강 노동자들도 위의 가지 방식 모두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은 부의 대량 생산이 오직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소수의 특권 집단이 지배하는 경제 체제(, 자본주의 체제) 대해 인류가 지불하고 있는 대가이다. 이들 소수의 특권 집단들이 직접 산업체를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가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산업을 통제하고 있느냐(영국철강의 경우처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 소수의 특권 집단인 자본가들이 국내적으로건 국제적으로건 이러한 통제력을 이용하여 최대 몫의 이윤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이면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광기는 이른바 "과잉 생산" 위기가 결코 진짜 과잉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남아도는" 강철은 세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도움이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는 아직도 나무 쟁기로 땅을 갈아야 하는 농민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철로 만든 쟁기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들한테 도대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이윤을 획득할 없을 테니까.
 

  공황이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황이 단조로운 규칙성을 띠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투자가 특별한 기복이 없이 균등한 비율로 이루어질 때조차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향하는 전반적인 추세를 벗어날 없다. 이것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 절약 설비에 투자하지 않을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국에서 거의 모든 신규 투자는 고용되는 노동자 수를 줄이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 동안 산출량은 약간 늘었으면서도 현재 영국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10 전의 고용된 산업 노동자 수보다 적다.

  생산을 "합리화"함으로써만, 그러니까 생산성을 증대시킴으로써만, 그리고 노동력을 감축시킴으로써만,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보다 몫의 이윤을 얻을 있다. 그러나, 체제 전반에 미치는 결과는 파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성이 증대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수가 투자와 같은 속도로 증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계속 돌아가게 하는 연료인 이윤의 원천은 노동자들의 노동이다. 만약 당신이 투자에 상응하는 이윤의 원천(노동) 증가 없이 점점 많은 투자를 한다면, 당신은 파산을 향하고 잇는 것이 된다. 마치 4기통 승용차를 굴리는 필요한 휘발유의 양으로 12기통 스포츠카를 몰려고 생각한다면 고장나는 것이 확실하듯이 말이다. 점은, 120 마르크스가 "신규 설비에 거액의 투자를 쏟아 넣는 자본주의가 성공한다는 바로 사실이야말로 갈수록 악화되는 공황을 뜻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초래한다" 주장했던 이유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날늘의 자본주의에 아주 간단하게 적용될 있다. "불황"에서 "호황"으로 전환된다는, 그러니까 "어려운" 시절에서 "좋은" 시절로 전환된다는, 낡은 경제변동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끝없는 경기 침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 호전의 시기, 혹은 실업의 감소는 한계가 있고 극히 짧다.

  (자본주의)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런 현상이 투자 수준이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규 투자가 없으면 새로운 일자리도 없고, 새로운 일자리가 없으면 새로운 상품을 돈도 없게 된다는 그들의 지적에 관한 우리는 동의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임금을 탓한다. 임금이 너무 높아서 이윤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투자하기를 겁내는 것은 "충분한 보답"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체제 옹호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러 동안 정부의 임금 정책이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고 이윤을 크게 해주었는데도 공황은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 반면---상위 10% 소득은 1974 전체 국민 수득의 57.8%에서 1976 60% 상승했다---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20세기 들어 가장 폭으로 떨어졌으며, 1975~78년은 심각한 공황기였다.

  아직도 공황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서독 임금이 떨어져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120 전에 마르크스가 말한 것을 듣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투자만큼 이윤의 원천인 노동이 빨리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공황은 심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1인을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공장과 기계의 가치가 상당히 낮았을 글을 썼다. 노동자 1인당 자본 가치는 때부터 폭등하여 마침내 오늘날은 2 파운드, 심지어 3 파운드에 달한다. 자본주의 기업간의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더욱 크고 더욱 비싼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없도록 만들어 왔다. 이제 대부분의 산업에서 기계를 새로 도입하면 노동자 수를 줄이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국제적, 경제 기구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세계의 주요 국민경제의 고용 수준은 기적이 일어나 투자가 급증한다고 해도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투자는 급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윤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들의 투자가 4 증가해도 이윤은 겨우 2배가 된다면 그들은 정말로 속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의 원천인 노동보다 산업이 빨리 성장하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윤율'(총이윤/총투하자본) 저하하는 경향 있다. 그는 어떤 새로운 투자도 위험한 모험으로 보이는 시점이 결국 것이라고 예견했다. 새로운 공장과 기계에 필요한 지출액의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지만, 이윤율은 전보다 낮아질 것이다. 이런 시점에 이르렀을 자본가(혹은 자본주의 국가) 새로운 초대규모 투자 계획을 꿈꿀 수는 있지만 파산의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이와 아주 흡사하다. 영국의 로버(Rover)사는 새로운 생산 라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고 있다. <¿µ±¹Ã¶°­>(British Steel) 회사도 그들이 15 전에 계획했던 거대한 공장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생산량을 없기 때문에 거대한 공장 건설 계획을 동결해 두어야 한다. 일본 조선업자들도 새로운 조선소에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일부 낡은 조선소들은 문을 닫고 있다.

   거대하고, 생산성이 높은 기계를 설치하는 자본주의가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본주의를 명백히 영구적 공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고대 노예 사회와 중세 봉건 사회는, 혁명이 일어나 사회를 변혁시키거나 사회를 퇴보시키는 영구적 위기에 돌입하는 양단간의 사태에 이른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 혁명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문명은 파괴되고 암흑 시대에 들어가게 것이다. 어떤 봉건 사회의 경우---영국과, 후의 프랑스도---혁명이 낡은 질서를 파괴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질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 자체는 영구적 위기로 인해, 결국 인류가 기아와 전쟁의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냐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