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광장’을 들으며 배우는 음악과 문학
H형
아침 저녁으로 스미는 차갑고 신선한 바람이 정신을 맑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근길에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되는 것을 보면 가을은 정녕 사색의 계절인 듯합니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길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라디오를 켭니다. 제 오디오의 튜너는 늘 고정되어 있답니다. 동료들에게는 튜너가 고장이 났다고 말하고 또 움직이지 않지만 사실은 클래식 음악만을 듣고 싶은 저의 소박한 욕심 때문에 튜너를 손질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클래식 음악은 저에게 안타까운 외사랑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설렘과 애절한 감정처럼 말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너무 모르는 탓도 있었고 그래서 때로 클래식 음악이 ‘보기 싫은’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쳐다봅니다. 클래식 음악은 고상한 사람들이나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듯합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라디오만 켜면 하루 내내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집에 좋은 오디오가 있을 때도 FM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들을 시간이나 정성이 없었습니다. 마음먹고 듣는 것도 CD나 카세트 테이프로 한두번 듣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집이 시외라 KBS 1 FM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고, FM 방송을 듣기 위해 방의 가구 배치를 전부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감도의 실내 FM전용 안테나를 구입하고 나서 방송국은 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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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작업을 할 때 언제나 라디오를 켜 놓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고정되어 있는 KBS 1 FM방송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언제나 소중한 마음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광고가 없는 방송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정보의 전달자인 방송이 정서를 해치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음이 되는 까닭이 바로 광고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마다 부담 없는 클래식과 국악, 깊이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FM방송을 들으며 편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요와 팝을 함께 들어오다가 아주 조금씩 마음이 한곳으로 기우는 나를 발견한 것이 지난해였습니다. 가요나 팝 음악을 듣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생활에서 음악이 빠질 수 없다면 그 음악의 중심을 클래식으로 하리라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클래식 광장’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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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고 듣는 것은 잘하는 편입니다. 클래식 전문 잡지를 사보고 좋은 음반이 나오면 메모했다가 구입을 하고, 값싼 CD를 파는 곳에서 만원에 서너 장씩 사다 열심히 듣기도 합니다. 헌책방에서 영문으로 된 두툼한 음반 가이드를 구입했을 때는 보물을 얻은 것만 같았답니다. 제 책장에는 음악에 관한 서적이 두 칸 정도는 꽂혀 있고 시간이 나면 틈틈이 꺼내 읽고는 합니다.
‘클래식 광장’은 늘 들으면서도 이내 잊혀지고는 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진행자가 말도 아주 적게 하고 음악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으니 아직 클래식에 귀가 뚫리지 않은 저로서는 ‘소 귀에 경읽기’가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이 프로그램이 언제나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주제와 음악은 그동안 책에서도 읽지 못했던 내용들이었고 주제에 맞는 음악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맞는 주제라는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는 데 놀라고 말았습니다.
음악과 문학이 본래 하나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서양 음악은 특히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아주 관심 있게 들은 주제가 있는 음악은 이탈리아의 13세기와 14세기 문학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많지만 13-14세기에 유명한 작가로 단테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단테를 두고 쓴 교향곡으로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이 있고 단테가 쓴 ‘신곡’을 오페라로 만든 푸치니도 있습니다.
서양의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정의되고 있지만 그 음울한 시대에서도 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안 챤트가 11세기 이후에 단성음악에서 다성음악으로 바뀌고 13세기 이후에는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이 서로 긴밀한 교류와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결국 14세기에 이르면 귀족음악이 대중화되어 음악의 영역이 넓어져 민중들도 자기들의 음악을 갖게 되지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당시에는 귀족과 양민, 천민의 구분이 뚜렷했으나 수도사나 방랑집단들이 퍼뜨리는 음악을 통해 고귀한 종교음악도 대중 속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중세, 특히 이탈리아의 중세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이탈리아의 석학 움베르토 에코 때문입니다. 에코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원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음울함, 기독교의 절대주의, 기독교 외적인 지식에 대한 탄압,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의 대립, 타락한 종교 지도자, 이교도의 문제 등 그 시대의 기독교 문화에 대한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그의 소설을 읽고 나서 마치 거대한 지식의 늪에 빠진 듯 한동안 허우적거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후부터 유럽의 중세와 이탈리아 문학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는데, 마침 ‘클래식 광장’에서 13-14세기 문학을 주제로 한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연주되는 곡목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작곡자와 작품번호 조차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런 음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은 기분입니다.
하긴, 지금 퍽 좋아하는 구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만나게 된 것도 또스또예프스키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좋아했기 때문인 것을 보면 문학과 음악은 정말 뗄 수 없는 사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클래식 광장’에서 새로운 주제인 ‘명상과 철학’이 소개되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주제로 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음악이 언제나 내 마음의 중심을 흘러갈 수 있도록 한다면 음악은 영혼처럼 깃들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양식이 영혼을 키우듯이 말입니다. 이 가을, 정신을 벼르는 차가운 바람과 떨어지는 잎새의 처연함 속에서 마음의 향을 아름답게 피우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