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마루프레스 운영자가 [뿌리깊은나무]를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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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이 글을 쓰던 1976년에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였지만, 그 이후의 삶은 이규호처럼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에 관한 기사를 찾아봤다.
김형효교수에 대한 학계평가는
철학연구자로서 김형효 교수에 대한 학계전체의 평가는 반반으로 엇갈린다. 특히 최근의 동·서양철학에 대한 비교연구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서양철학의 시각으로 동양사상을 재단한다는 동양철학계의 문제제기도 간간이 들린다.
그러나 김교수의 작업에 대한 학계 일부의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인용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하다.
이정우 전서강대교수가 얼마전 격주간‘교수신문’에 기고한 한 프랑스 구조주의 연구서에 대한 서평에서 지난 1989년 나온 김교수의 저서‘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들며,“10여년전에 나온 책인데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지금 나온 책보다 충실한데도 인용조차 되지않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사실 한 철학연구자가 평생동안 연구한 결과로 내놓은 업적이 기껏해야 개설서나 연구논문집 1∼2권에 불과한 국내 학계의 현실에서 김교수의 작업은 높이 평가하고도 남음이 있다.이번에 출간된‘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외에도‘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철학과 여정의 형이상학’‘베르그송의 철학’‘데리다의 해체철학’‘메를로-뽕티와 애매성의 철학’‘노장(老莊)사상의 해체적 독법’‘원효에서 다산까지’등 사유의 깊이와 폭을 일정하게 갖춘 연구서들만해도 10권은 넘는다.
이밖에도 원효와 율곡,퇴계,다산 등 한국의 철학자들에 대한 공동연구작업의 결과물을 비롯해 최근 5년간 발표한 논문만도 30여편에 이른다.
이같은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김교수는 여전히 국내 철학계에서 변방의 비주류 학자일 뿐이다.그 이유는 뭘까.일단 학문외적인 데서 우리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지난 85년 광주항쟁을 유혈로 진압하고 성립한 전두환(全斗煥)정권아래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12대)으로 참여한 전력이 그의 학자로서의 이미지에 만회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 것이다.
게다가 민정당 국책연구소 이념연구실장이란 타이틀은 정권에 봉사하는 어용 이데올로그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켰을 뿐이다.이는 김교수의 작업을 인정하는 학자들까지도 정작 그의 성과를 수용하길 꺼리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마찬가지로 김교수가 국책연구기관으로 학계와의 연계가 부족한 정문연에 소속돼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같은 학문외적인 문제를 떠나 이제 그의 작업이 가진 양적·질적 독창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사실 김교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데는 비교철학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우리 학계의 폐쇄성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들어 동·서양 철학의 접목에 관심을 갖고 작업중인 이진우 계명대교수와 이정우교수 등은“김교수를 우리 학계에서 다작이면서도 나름대로 사상적 일관성과 일정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독특한 성과를 많이 낸 학자로 평가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정우 교수는 ▲연구를 통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결론의 제시가 없고 ▲아직까지 양적인 성과에 비해 저자 나름의 철학이 명확히 안보이며 ▲다소 고답적인 글쓰기가 아쉽지만“기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작업조차 시도한 사람이 드문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봐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우교수는“국내에서 동·서양철학을 김교수만큼 두루 이해하고 있는 학자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김교수의 예를 들며 동양철학계의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함께 자신의 전공이나 코드에 맞는 논문만 인용하고 전혀 다른 방식의 독창적인 작업에 대해선 무시해버리는 국내 학계의 행태도 개선돼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벨기에 루벵대에서 마르셀 연구로 학위를 한 김교수는 서강대교수를 거쳐 82년 정문연으로 소속을 옮기면서 동양철학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모르는 것이 있으면 동료교수와 후학들에게 민망하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했다”는 한형조 정문연교수의 말은 올해로 회갑을 맞은 김교수가 학문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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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대담=한형조 교수)
2009년 07월 24일 (금) 15:00:22 사진ㆍ정리=이강식 기자 lks97@ggbn.co.kr
동·서양 철학을 섭렵한 뒤 원효사상에 심취해 늦깍이 불자가 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그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종교로 불교를 꼽았다. 2005년 정년 퇴임하면서 “불교 수행에 매진하겠다”는 말을 남긴 그를 만났다. 편집자
불교, 山中서 도심으로 내려와야
◇단 한 번도 청하 스님(입적)을 만난 적이 없지만, 김형효 교수는 청화 스님이 정신적 스승이라고 말했다.
한형조(이하 한) : 2005년에 정년퇴임하셨습니다. 그간 동ㆍ서양의 철학을 섭렵하셨고, 퇴임 때 수행에 매진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기가 있으신가요?
김형효(이하 김) : 인문학(철학)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아 왔어요. 철학이 생경한 학문으로만 남아 도(道, 수행)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생활과 동떨어진 관념이 되고 마는 경우를 여러 번 목도했습니다.
불교학대회서 느낀 점은 불교가 생활 속에서 깊은 도가 돼야 하는데 그냥 학문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듣는 사람도 재미없어 하죠. 부처님이 경계하신 마른 지혜죂乾慧죃가 된 겁니다.
은퇴 후 마지막 남은 삶은 학문을 도(道)로 심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수행에 매진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 매일 수행을 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김 : 모임에 매일 나가 참선 공부는 하지만 참선은 안 해 봤다고 말합니다. 사찰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하는 수준이죠. 스님들이 화두를 주시는데, 무조건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관심 있는, 자기에게 절실한 문제와 연관된 화두를 들고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불교 수행의 요체는 부처되는 길이 무엇이고 대승의 길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죠.
한 : 불교와 인연 맺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입적하신 청화 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 참 훌륭한 스님이시죠. 제가 업이 많은지 그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 분이 제 업을 녹여주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방학 때 만나러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만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연이 안 닿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스님의 저서를 사서 읽기도 했죠.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무슨 인연이 있는지, 청화 스님과 인연 있는 사찰인 서울 광륜사에서 청화 스님 관련 원고를 써달라고 해서 스님의 은덕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 계속 글을 쓰고 있어요.
한 : 선불교의 등장은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교학의 확대로 건혜(乾慧)로 빠지니까 직접 수행을 강조하는 선불교가 일어났죠. 학계를 중심으로 교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김 : 모든 일에 일희일비가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논리입니다. 뭐든지 지나치면 좋지 않은데, 저는 교학이 결여된 선수행 일변도는 많이 공허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空)사상도 색을 배제해 버리면 아무런 내용없이 공허해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사상은 인간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공과 색을 동시에 얘기하면서 또 무와 유를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승찬 대사는 《신심명》에서 무(無)와 유(有)가 같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교인데, 말씀을 통해서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눈과 지혜를 익힐 수 있습니다.
한 : 선의 역사를 보면, 선의 종장(宗長)들은 오랫동안 교학을 공부하고 선수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대철학이 언제부터 수행을 배제해 왔습니까?
김 : 동ㆍ서양의 어떤 철학도 수행의 방법이 다를 뿐, 불교적 의미에서 수행을 배제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의 방식에 있어서 서양의 기독교 신학이나 동양의 유학은 늘 도덕적 방법을 택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수행은 도덕적·윤리적인 의미의 수행이 아닌 존재론적인 의미의 수행입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존재의 의미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는 삼라만상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방식, 즉 관(觀)이 매우 중요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선(善)을 중시하면서 악을 배제하지 않는, 선과 악이 늘 동시에 성립하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라고 합니다.
이건 선이다, 이건 악이다’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주자학이나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것이지, 불교에서의 선악은 불이(不二)의 관계입니다.
한형조(52)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교수
저서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등이 있다.
김형효(70)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박사
전 공군사관학교, 서강대 교수
전 루뱅대 연구교수
12대 국회의원(민정당)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 : 불교의 장점은 무엇이고,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보십니까?
김 : 불교는 아주 실리적이고 실학적인 종교이자, 세상을 바꾸는 철학입니다. 붓다가 이 세상에 나타난 까닭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고통을 덜 받고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고방식을 바꿔야만 인간이 행복해지고, 불국토가 됩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장 쉽게 중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생활 속에서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한 방편을 보여주셨죠. 그래서 가장 실용적인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불교적 사유, 즉 나의 무의식을 알고 길들여 조용히 잠재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치솟는 번뇌망상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번뇌망상, 갈등, 질투 등에 얽매이면 나 자신도, 이웃도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격정에 휘말리고 있는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대단히 필요합니다.
한 : 원효 사상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원효 스님을 평가하신다면?
김 : 원효 대사가 왜 파계를 했을까요. 불교의 계는 도덕ㆍ윤리적인 계율을 지킨다는 의미보다는 정(定)에 들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정에 들어야 지혜를 얻게 됩니다. 만인의 추앙을 받던 학승 원효는 하루아침에 계를 잃어버림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멸시를 받게 되고, 결국 하심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원효는 고고한 학승이 아니라 전쟁고아, 과부, 상의군인들에게 위안 주는 만인의 보살이 된 것입니다.
한 : 한국불교의 기본 두 축은 궁극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스님과 절에 가서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중생입니다. 극심한 경쟁 탈피, 인간성 회복 등 시대적 요구에 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김 : 중생과 부처의 마음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심리적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돈, 권력, 지식 등 남이 안 가진 걸 가졌다고 으스대는 사람은 중생의 사고방식을 못 벗어나고, 부처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공부하신 스님들은 대중들이 복을 구하는 것을 너무 무시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불행하니까 복을 찾기 때문이죠. 스님들은 중생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올바른 길로 안내해 복을 찾는 방법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스님이라도 설법을 잘해 주셔야 됩니다. 지금은 대중 시대인데 대중을 외면한 종교는 생명이 끊어집니다. 스님들은 설법을 통해 대중들과 접촉하는데, 선수행만 하신 스님들이 과연 설법을 잘 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떤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교학은 공부하지 않고 선수행만 하는 스님들은 대중 만나는 일을 기피한다. 대중법문에서 말을 별로 하지 않으면 대중들은 스님을 외면하게 되고, 스님도 할 말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을 외면한다”고요. 가슴에 절절히 와 닿았습니다.
한 : 평소 재가불자들을 직업을 통한 부처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해 오셨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김 : 나를 벗어나서 남들을 이롭게 해주는 사람은 부처의 길에 이미 들어섰다고 봅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원돈성불론》에서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보광명지를 밝히면, 중생상이 여래상이고, 중생심이 곧 여래심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이루는 정치와 산업과 기술과 예술 등의 공교기예(工巧技藝)가 다 여래의 보광명지를 운영하는 다양한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손재주를 갖고 있으면 그건 동시에 내 속에 들어있는 불심의 밝은 지혜가 있다는 거죠. 그걸 통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사회에 기여도 하게 됩니다. 직업을 통해 이타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옵니다.
불성 회복보다는 훨씬 생활 가까이에서 매일 돈벌고 일하는 그 속에서 부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국토의 길입니다.
한 : 한국불교계에 제언을 해주신다면?
김 : 사회불교는 정치판에 뛰어들어 여야 편가르기에 참여하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재가자 중에서도 능력 있는 이들을 모아 편안한 국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학자는 말할 나위 없고, 상인도 부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만인이 자기 직업에 충실하면서 능력을 발휘해 부처가 되는 길이 불국토를 이루는 길입니다. 말로만 ‘불국토’를 외치지 말고 부처들이 사는 나라, 현실감이 없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가 돼야 합니다.
또 불교 제도를 이원화해 수행승과 포교승이 일정 기간을 정해 서로 순환하면서 수행하고, 포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산중불교요, 성불불교에요. 부처되기 전에 중생제도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언제 부처돼서 중생을 제도합니까. 혼자 부처되는 길 찾다가 결국 중생제도는 하지 못하고 시간만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산중에서 시중으로 내려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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