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2
우 리들 의 십 년
김남주 시 평론
남주 , 벌써 한 달음 에 십 여 년 세 월 이 흐 르 고 말 았구 나 .
내가 초라한 가산을 트럭에 때려 싣고 76 년의 가을, 우슬재를 굽이굽이 돌아 넘었을 제 멀
리 저 아래쪽에 해남읍이 잃어 버린 고향처럼 저녁노을에 물들어 있었지. 그리고 고개 옆에
는 유신독재 시대의 상징이었던 새마을 구호와 함께 반공 표어가 적힌 선전탑이 뻔뻔스럽게
서 있었다.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라고 말이야. 나는 그 때 트럭의 운전수
옆자리에에 앉아 그 표어를 읽으면서 낄낄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유머어라
도 있었다고 나중에야 알 게 되었지. 해남에 살 게 되면서 해변의 어느 국민학교 앞을 지나
다가 시멘트 담벼락에 쓴 붉은 페인트 글씨를 보고는 나는 다시 소스라쳤다. "찢어 죽이자,
공산당! " 동백이 고운 꽃봉오리를 부끄러운 듯이 감추고 있는 학교 앞에는 어린이들이 밝은
목소리로 떠들면서 걸어가고 있었더. 그 붉은 페인트의 선명함과 폭력성에 소름이 끼치던
게 생각난다. 이곳이 내가 잃어 버린 고향을 찾아 돌다가 닿게 된 너와 나의 해남이었다.
분단된 나라, 유신시대의 벽지. . . . . . , 나는 너와 더불어 조국의 허리가 잘리고 외국군대가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 조국의 그 어느 모퉁이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데에 합의했
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 우리 시골 집 뒤안의 4 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파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떨던 밤에, 우리는 식민지 시대와 6 .25의 아수라장을 허덕거리며 오직 생존하여 왔던 부모
들의 얘기며 집안 얘기를 했고, 유년시절에 배웠던 어딘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을 때리는
듯한 노래들을 나직히 불러봤지.
노 래부 르 세 즐 거 운 노 래
이른 아침 안개 를 뚫 고
내 일 은 전선 멀 리 떠 나 갈
이 밤을 노 래 부 르 자
그런데 남주 너는 언제나 반음씩이 틀려서 나중에 너희 후배들도 틀린 노래를 전파시키고
말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들은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고향"이라든가, "엘레나로
변한 순이" 같은 흘러간 노래들이었지.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광주로 나가서는 너는 날마다
같은 노래만을 불렀다.
가 난 한 마을 에 자 라 난
농 노 의 아들 딸 아
악 독 한 원 수 와 싸 움 에
동 무 가 되 었 구 나
하는 노래였다. 내가 가사를 적어주고 가르쳐 준 노래 중에서 유독 그 노래만을 너는 틀리
지 않고 불렀다.
나는 그 때 서울 살림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는데, 어딘가 일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서 그
들과 함께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나의 문학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
만 같았다. 남주 너는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광주에서 후배들 가르친다고 열어 두었던 서점
을 다 들어먹고, 구속자협의회 동지를과 약속한 대로 모두들 현장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진
뒤에 너도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사랑방 농민학교 운동을 시작했고 그 때에
정광훈. 윤기현. 홍영표 그리고 네 그림자나 다름없던 이강 등이 합세했지. 우리는 해남 농민
회를 발족시켰으며, 전남 현장문화운동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서림 숲 마당에서 네가 농민
들을 위해 읽었던 "고구마 똥"이란 재미있고 낙천적인 시가 생각난다. 농민들이 배를 잡고
웃었지. 농민들은 네가 시인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아마도 도시의 부르조아 시인들은 네
여러 가지의 민중적인 행태가 시의 고상함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한봉이가 아직 감옥에 있었을 때인데, 너하고 권행이가 찾아와서 지하신문을 발행할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었지. 그때 너는 말했어. "나는 구체적으로 싸우고 싶소"라고. 나는 오히려
광주로 나가게 되면 그런 준비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너의 들끓는 심사를 가라앉혔지. 나
도, 또한 너도 그 무렵의 우리는 우리가 해남에서 뜨뜻미지근한 일을 하면서 참다운 싸움을
기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시민적인 지식인 나부랑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 시
달렸던 것 같다. 그 무렵에 네가 쓴 덕종이에게 보내는 시라든가, 달빛마저도 마을 사람들
도 부끄러워 밤에 몰래 고향으로 기어든다는 시라든다 하는 것들은, 네가 얼마나 농민의 아
들로서 올바르게 싸우지 않고 있다는 자의식에 괴로워 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버지와 농토에 관하여 얘기했을 적에 받았던 감동을 잊지 않고 있다. 자식들을 가르
치시느라고 그나마 평생을 걸려서 이루어 놓은 농토를 팔고는 그쪽 밭뚝가를 걸으시면서 차
마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하고 가신다는 너의 아버지, 따에 자란
것들은 모두가 새끼 같아서 곡식이고 푸성귀고 간에 살필 적마다 쓰다듬고 보살피시는 것
보면 속으로는 우리도 저렇게 사랑하시겠거니 하면서 부러워했다는 남주. 너는 아버지 보다
는 어머니를 안쓰러워하고 그이를 시로 쓰더니 이제 저 컴캄한 감옥의 십년을 거쳐서 또 다
른 민중인 네 아버지를 발견하고 네가 어느 계급을 깊이 사랑하는지를 쓰고 있다.
그래 그랬었다 그는/ 새벽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를 깨워 재촉했다/ 해가 중천에 뜨겠다
어서 일어나 소 뜯기러 가거라/ 그래 그랬었다 그는/ 지각할까봐 아침밥 먹는둥 마는둥 사립
문을 나서면 내 뒷통수에 대고 재촉했다/ 학교파하면 핑 와서 소 쌀 비어라이 길목에서 놀았
다 봐라 다리몽갱이를 분질러 놓을팅게/ 그래 그랬었다 그는/ 방금 전에 점심먹고 낮잠 한숨
붙이려는데 나를 깨워 재촉했다/ 해 다 넘어 가겄다 어서 일어나 나무하러 가거라/ 그래 그랬
었다 그는/ 저녁 먹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 좀 하고 있으면/ 벌써 한숨 자고 일어나 재촉했다/
아직 안자냐 석유 닳아진다 어서 불끄고 잠자거라/ 그래 그랬었다 그는/ 소가 아프면 읍내로
약을 지으러 간다 수의사를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바빴으되/ 배가 아파 내가 죽는 시늉을 하
면 건성으로 한마디 할뿐이었다/ 거시기 뒤안에 가서 물꼬시나무 뿌리 좀 캐서 달여 맥여/
( 중략) 그래 그는 머슴이었다/ 십 년 이십 년 남의 집 부자집 머슴살이었다/ 나이 서른에 애
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중략) 그는 죽
었다 홧병으로/ 내가 부자들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그는
죽어가면서 유언을 남겼다 한다/ 진갤논 일곱 마지기는 둘째놈한테 띠어 주라고/ 성찬이 한번
보고 죽었으면 싶다고(*성찬이는 남주의 아명)
그래 남주 이 사람아, 제가 도망다닐 제 우리 친구들이 집에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언제쯤인
가 대강 시절이 좋아져 네가 사면되어 나오게 될 줄로 알고 "둘재가 나와 장가들 게 되면
내 소 한 마리 잡을팅께"라며 장담을 하셨지. 하지만 그러시는 모습이 쓸쓸하다고 누이가
말을 하더니 그만 뒤에 작고하신 소식만 들었지.
어쨋든, 너와 함께 광주로 나와서 상윤네 <녹두서점>을 근거로 민중문화연구소를 시작했고
문화패 <광대>를 조직했다. 광주항쟁 때 장렬히 전사한 상원이 그리고 효선이. 윤기.선출이.
몽구. 태종이. 정희. 희숙이와 함께. 그 녀석들도 이제는 모두 애기 아버지 엄마가 되었다. 그
런데 석률이 아우 석삼이가 날 찾아 오더니 네가 독서회 사건에 걸려 지명수배 중이라고 알
려줬지. 너는 일어판 레닌 선집, 고리끼, 파리꼼뮨 같은 책들을 한보따리 가지고 있었는데
회원 중의 하나가 복사한 교재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임이 들통이 난거였더. 한봉이가 막 출
옥을 했을 때였는데, 그가 네게 서울로 도피할 것을 권유했지. 너는 그때 나에게 불쑥 두
장의 번역편지를 주고 갔고 호준 엄마는 그 편지를 장롱에 손수건에다 싸서 보관했었다. - -
피델, 나는 먼저 떠나네. 라고 시작되는 체. 게바라의 편지였다. 그들이 만난 일들, 카스트
로의 혁명적 낙관주의, 죽어간 동지들 얘기, 그리고 그가 행정가로서 유능하지 못했던 자
책, 가족들에 대한 부탁, 마지막으로 자기는 제국주의적 압제에 신음하는 세계의 인민을 찾
아서 떠나련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또 다른 하나는 게바라가 아직 갓난 아이었던 딸과 아들
을 빌려 아내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아이들이 다 자란 청년이기나 한 것처럼 아버지의 사
상과 이상적 결단에 대하여, 그리고 인민을 향한 사랑에 관하여 자상하게 쓰고 있었다. 지
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에는 아빠는 아마도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아직 나의 생각을 이해할 나이는 아니지만 아빠는 너희들을 위하
여 떠난다- - 하는 대목이다.
그것이 네가 내게 썼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너는 나하고 동행했던 부산이라든가 대
구라든가 서울이라든가 하여튼 모든 대도시를 지옥이라고 표현했고, 네루다의 시구를 빌려
제국주의적 도시를 비웃었는데 그 지옥의 서울로 가서 조직에 들어갔다. 유신시대 전 기간
을 통하여 독재자가 죽기 바로 직전까지 가장 전투적으로 파쇼와 싸웠던 조직의 전사가 되
었지. 서울에서 도피중이면서 매번의 작전에 참가했던 너를 만나면, 너는 저 벼랑의 새로운
길을 기어 오르는 비유로써 통일운동의 선명한 노선을 말하곤 했지. 또 너는 말했어. - - 어
떤 때엔 몸이 마구 떨릴 정도로 무섭소. 하지만 이것은 기쁜 두려움이오. 참으로 이 길은
무섭고 엄숙한 길이어라우.
아! 나는 실로 반 년 뒤에 광주의 내 아우들이 너와 똑같은 길로 치달려 행군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남주, 지난 십년은 내 동무들과 아우들의 피어린 투쟁과 헌신으로부터 이렇듯이 통일운동을
향한 넉넉한 터전이 닦여진 세월이다. 나는 감옥의 너에게 한 줄의 편지도 한 권의 책도 전
하지 못하고 너의 안쓰럽고 고운 각시 광숙씨나 강이 형선이 권행이에게 풍편의 소식을 들
을 뿐이었구나.
밖에서 네 시가 차츰 더욱 무쇠처럼 단단하고 풀무불처럼 뜨거워지는 경향을 기쁨과 부끄러
움으로 지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에서 살아간다는 일의 의미를 생활을
통하여 노래하는 시도 나오기 위해서는 너를 어서 환한 민주의 햇빛 아래 해방시켜야 한다
고 다짐하는 것이다.
남주, 저 어두운 거리 교문 앞에서 전투경찰과 대치하여 밤을 새우는 젊은 이들의 줄지어
앉은 거뭇한 덩어리를 보면서, 시멘터 벽속에서 똑같은 결단과 자세로 앉아 있을 너를 생각
한다.
오 늘 밤도 네 고 장 노 령 산 맥을 지 나는 솔 숲 의 바 람소 리 가 가 슴 에 스 며드 는 듯 하 구 나 .
1988 년 8월, 서울에서
황석영
김남주 시 평론
남주 , 벌써 한 달음 에 십 여 년 세 월 이 흐 르 고 말 았구 나 .
내가 초라한 가산을 트럭에 때려 싣고 76 년의 가을, 우슬재를 굽이굽이 돌아 넘었을 제 멀
리 저 아래쪽에 해남읍이 잃어 버린 고향처럼 저녁노을에 물들어 있었지. 그리고 고개 옆에
는 유신독재 시대의 상징이었던 새마을 구호와 함께 반공 표어가 적힌 선전탑이 뻔뻔스럽게
서 있었다.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라고 말이야. 나는 그 때 트럭의 운전수
옆자리에에 앉아 그 표어를 읽으면서 낄낄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유머어라
도 있었다고 나중에야 알 게 되었지. 해남에 살 게 되면서 해변의 어느 국민학교 앞을 지나
다가 시멘트 담벼락에 쓴 붉은 페인트 글씨를 보고는 나는 다시 소스라쳤다. "찢어 죽이자,
공산당! " 동백이 고운 꽃봉오리를 부끄러운 듯이 감추고 있는 학교 앞에는 어린이들이 밝은
목소리로 떠들면서 걸어가고 있었더. 그 붉은 페인트의 선명함과 폭력성에 소름이 끼치던
게 생각난다. 이곳이 내가 잃어 버린 고향을 찾아 돌다가 닿게 된 너와 나의 해남이었다.
분단된 나라, 유신시대의 벽지. . . . . . , 나는 너와 더불어 조국의 허리가 잘리고 외국군대가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 조국의 그 어느 모퉁이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데에 합의했
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 우리 시골 집 뒤안의 4 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파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떨던 밤에, 우리는 식민지 시대와 6 .25의 아수라장을 허덕거리며 오직 생존하여 왔던 부모
들의 얘기며 집안 얘기를 했고, 유년시절에 배웠던 어딘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을 때리는
듯한 노래들을 나직히 불러봤지.
노 래부 르 세 즐 거 운 노 래
이른 아침 안개 를 뚫 고
내 일 은 전선 멀 리 떠 나 갈
이 밤을 노 래 부 르 자
그런데 남주 너는 언제나 반음씩이 틀려서 나중에 너희 후배들도 틀린 노래를 전파시키고
말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들은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고향"이라든가, "엘레나로
변한 순이" 같은 흘러간 노래들이었지.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광주로 나가서는 너는 날마다
같은 노래만을 불렀다.
가 난 한 마을 에 자 라 난
농 노 의 아들 딸 아
악 독 한 원 수 와 싸 움 에
동 무 가 되 었 구 나
하는 노래였다. 내가 가사를 적어주고 가르쳐 준 노래 중에서 유독 그 노래만을 너는 틀리
지 않고 불렀다.
나는 그 때 서울 살림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는데, 어딘가 일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서 그
들과 함께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나의 문학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
만 같았다. 남주 너는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광주에서 후배들 가르친다고 열어 두었던 서점
을 다 들어먹고, 구속자협의회 동지를과 약속한 대로 모두들 현장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진
뒤에 너도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사랑방 농민학교 운동을 시작했고 그 때에
정광훈. 윤기현. 홍영표 그리고 네 그림자나 다름없던 이강 등이 합세했지. 우리는 해남 농민
회를 발족시켰으며, 전남 현장문화운동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서림 숲 마당에서 네가 농민
들을 위해 읽었던 "고구마 똥"이란 재미있고 낙천적인 시가 생각난다. 농민들이 배를 잡고
웃었지. 농민들은 네가 시인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아마도 도시의 부르조아 시인들은 네
여러 가지의 민중적인 행태가 시의 고상함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한봉이가 아직 감옥에 있었을 때인데, 너하고 권행이가 찾아와서 지하신문을 발행할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었지. 그때 너는 말했어. "나는 구체적으로 싸우고 싶소"라고. 나는 오히려
광주로 나가게 되면 그런 준비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너의 들끓는 심사를 가라앉혔지. 나
도, 또한 너도 그 무렵의 우리는 우리가 해남에서 뜨뜻미지근한 일을 하면서 참다운 싸움을
기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시민적인 지식인 나부랑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 시
달렸던 것 같다. 그 무렵에 네가 쓴 덕종이에게 보내는 시라든가, 달빛마저도 마을 사람들
도 부끄러워 밤에 몰래 고향으로 기어든다는 시라든다 하는 것들은, 네가 얼마나 농민의 아
들로서 올바르게 싸우지 않고 있다는 자의식에 괴로워 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버지와 농토에 관하여 얘기했을 적에 받았던 감동을 잊지 않고 있다. 자식들을 가르
치시느라고 그나마 평생을 걸려서 이루어 놓은 농토를 팔고는 그쪽 밭뚝가를 걸으시면서 차
마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하고 가신다는 너의 아버지, 따에 자란
것들은 모두가 새끼 같아서 곡식이고 푸성귀고 간에 살필 적마다 쓰다듬고 보살피시는 것
보면 속으로는 우리도 저렇게 사랑하시겠거니 하면서 부러워했다는 남주. 너는 아버지 보다
는 어머니를 안쓰러워하고 그이를 시로 쓰더니 이제 저 컴캄한 감옥의 십년을 거쳐서 또 다
른 민중인 네 아버지를 발견하고 네가 어느 계급을 깊이 사랑하는지를 쓰고 있다.
그래 그랬었다 그는/ 새벽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를 깨워 재촉했다/ 해가 중천에 뜨겠다
어서 일어나 소 뜯기러 가거라/ 그래 그랬었다 그는/ 지각할까봐 아침밥 먹는둥 마는둥 사립
문을 나서면 내 뒷통수에 대고 재촉했다/ 학교파하면 핑 와서 소 쌀 비어라이 길목에서 놀았
다 봐라 다리몽갱이를 분질러 놓을팅게/ 그래 그랬었다 그는/ 방금 전에 점심먹고 낮잠 한숨
붙이려는데 나를 깨워 재촉했다/ 해 다 넘어 가겄다 어서 일어나 나무하러 가거라/ 그래 그랬
었다 그는/ 저녁 먹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 좀 하고 있으면/ 벌써 한숨 자고 일어나 재촉했다/
아직 안자냐 석유 닳아진다 어서 불끄고 잠자거라/ 그래 그랬었다 그는/ 소가 아프면 읍내로
약을 지으러 간다 수의사를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바빴으되/ 배가 아파 내가 죽는 시늉을 하
면 건성으로 한마디 할뿐이었다/ 거시기 뒤안에 가서 물꼬시나무 뿌리 좀 캐서 달여 맥여/
( 중략) 그래 그는 머슴이었다/ 십 년 이십 년 남의 집 부자집 머슴살이었다/ 나이 서른에 애
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중략) 그는 죽
었다 홧병으로/ 내가 부자들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그는
죽어가면서 유언을 남겼다 한다/ 진갤논 일곱 마지기는 둘째놈한테 띠어 주라고/ 성찬이 한번
보고 죽었으면 싶다고(*성찬이는 남주의 아명)
그래 남주 이 사람아, 제가 도망다닐 제 우리 친구들이 집에 갔더니 아버지께서는 언제쯤인
가 대강 시절이 좋아져 네가 사면되어 나오게 될 줄로 알고 "둘재가 나와 장가들 게 되면
내 소 한 마리 잡을팅께"라며 장담을 하셨지. 하지만 그러시는 모습이 쓸쓸하다고 누이가
말을 하더니 그만 뒤에 작고하신 소식만 들었지.
어쨋든, 너와 함께 광주로 나와서 상윤네 <녹두서점>을 근거로 민중문화연구소를 시작했고
문화패 <광대>를 조직했다. 광주항쟁 때 장렬히 전사한 상원이 그리고 효선이. 윤기.선출이.
몽구. 태종이. 정희. 희숙이와 함께. 그 녀석들도 이제는 모두 애기 아버지 엄마가 되었다. 그
런데 석률이 아우 석삼이가 날 찾아 오더니 네가 독서회 사건에 걸려 지명수배 중이라고 알
려줬지. 너는 일어판 레닌 선집, 고리끼, 파리꼼뮨 같은 책들을 한보따리 가지고 있었는데
회원 중의 하나가 복사한 교재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임이 들통이 난거였더. 한봉이가 막 출
옥을 했을 때였는데, 그가 네게 서울로 도피할 것을 권유했지. 너는 그때 나에게 불쑥 두
장의 번역편지를 주고 갔고 호준 엄마는 그 편지를 장롱에 손수건에다 싸서 보관했었다. - -
피델, 나는 먼저 떠나네. 라고 시작되는 체. 게바라의 편지였다. 그들이 만난 일들, 카스트
로의 혁명적 낙관주의, 죽어간 동지들 얘기, 그리고 그가 행정가로서 유능하지 못했던 자
책, 가족들에 대한 부탁, 마지막으로 자기는 제국주의적 압제에 신음하는 세계의 인민을 찾
아서 떠나련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또 다른 하나는 게바라가 아직 갓난 아이었던 딸과 아들
을 빌려 아내에게 쓴 편지였다. 그는 아이들이 다 자란 청년이기나 한 것처럼 아버지의 사
상과 이상적 결단에 대하여, 그리고 인민을 향한 사랑에 관하여 자상하게 쓰고 있었다. 지
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에는 아빠는 아마도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아직 나의 생각을 이해할 나이는 아니지만 아빠는 너희들을 위하
여 떠난다- - 하는 대목이다.
그것이 네가 내게 썼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너는 나하고 동행했던 부산이라든가 대
구라든가 서울이라든가 하여튼 모든 대도시를 지옥이라고 표현했고, 네루다의 시구를 빌려
제국주의적 도시를 비웃었는데 그 지옥의 서울로 가서 조직에 들어갔다. 유신시대 전 기간
을 통하여 독재자가 죽기 바로 직전까지 가장 전투적으로 파쇼와 싸웠던 조직의 전사가 되
었지. 서울에서 도피중이면서 매번의 작전에 참가했던 너를 만나면, 너는 저 벼랑의 새로운
길을 기어 오르는 비유로써 통일운동의 선명한 노선을 말하곤 했지. 또 너는 말했어. - - 어
떤 때엔 몸이 마구 떨릴 정도로 무섭소. 하지만 이것은 기쁜 두려움이오. 참으로 이 길은
무섭고 엄숙한 길이어라우.
아! 나는 실로 반 년 뒤에 광주의 내 아우들이 너와 똑같은 길로 치달려 행군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남주, 지난 십년은 내 동무들과 아우들의 피어린 투쟁과 헌신으로부터 이렇듯이 통일운동을
향한 넉넉한 터전이 닦여진 세월이다. 나는 감옥의 너에게 한 줄의 편지도 한 권의 책도 전
하지 못하고 너의 안쓰럽고 고운 각시 광숙씨나 강이 형선이 권행이에게 풍편의 소식을 들
을 뿐이었구나.
밖에서 네 시가 차츰 더욱 무쇠처럼 단단하고 풀무불처럼 뜨거워지는 경향을 기쁨과 부끄러
움으로 지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에서 살아간다는 일의 의미를 생활을
통하여 노래하는 시도 나오기 위해서는 너를 어서 환한 민주의 햇빛 아래 해방시켜야 한다
고 다짐하는 것이다.
남주, 저 어두운 거리 교문 앞에서 전투경찰과 대치하여 밤을 새우는 젊은 이들의 줄지어
앉은 거뭇한 덩어리를 보면서, 시멘터 벽속에서 똑같은 결단과 자세로 앉아 있을 너를 생각
한다.
오 늘 밤도 네 고 장 노 령 산 맥을 지 나는 솔 숲 의 바 람소 리 가 가 슴 에 스 며드 는 듯 하 구 나 .
1988 년 8월, 서울에서
황석영

